45. 특별한 연휴의 시작

by 본비 은혜

늦은 아침 눈을 뜨니, 창밖으로 펼쳐진 아파트 앞동 뷰가 마치 시티뷰로 호텔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착각은 자유라던가. 내 마음이 그렇다.

3월이면 복직을 앞둔 막내딸은 마지막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더니,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기에 기꺼이 자유를 허락했다. 덕분에 누구를 챙길 필요도, 바쁠 것도 없이 오롯한 나만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팬 위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빵과 버터의 향기, 고소한 계란 프라이. 건강을 생각해 볶아낸 고송버섯과 가지런히 깎아 놓은 사과까지. 큰딸이 영국에서 직접 사 온 귀한 찻잔에 향긋한 TWG 차를 우려내니 근사한 룸서비스가 부럽지 않다. 식탁 한편에 놓인 주황색 클라란스 장미 세 송이가 나를 향해 빙긋 웃어준다. 어제 실컷 울어버린 덕분일까. 오늘은 다행히 미소가 지어진다.


나를 위해 정성껏 차린 식사를 마치고, 우아하게 차 한 잔을 비워낸 뒤 꽃을 다듬어 길을 나섰다. 그가 있는 공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는 참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아무 때나 찾아가도 그의 자리엔 늘 누군가의 마음이 놓여 있다. 우리 가족이 다녀가는 사이사이, 지인들과 친구들이 부지런히 그를 찾는다. 그게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모른다. 그가, 우리만을. 우리만이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된다.

엊그제는 막내딸이 아빠가 좋아하던 스타벅스 블론드 아메리카노를 두고 왔단다. 아빠의 취향을 세심하게 기억하는 딸의 마음이 기특하다. 누군가는 그가 좋아하던 지평 막걸리를 가져다 두었다. 술기운에 취하기보다 그 맛과 낭만을 좋아해 한 모금 넘기며 "맛있다"라고 배시시 웃던 그의 얼굴이 선하다.

문득 어느 비 오는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부침개를 부친 다고 하니 꼭 지평 막걸리를 사놓으라던 그의 부탁에 막내딸과 나, 그이까지 셋이 모여 앉아 작은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짠!" 소리와 함께 입술만 축이고는 아무도 마시지 않았던 그 술. 웃음 섞인 그날의 남은 막걸리는 결국 어디로 갔을까?

기억은 입술 끝에 닿았던 막걸리 한 모금처럼 달큼하고도 쌉싸름하게 남는다.


추모 공원에서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서둘러 원주 혁신도시로 향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신의 악단>을 예매했기 때문이다. 곧 내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서둘렀지만, 사실은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OTT로 편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뜨거운 열심과 노력을 영화관의 큰 스크린으로 마주하며 응원하고 싶었다. '나 한 사람이라도 봐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예매한 한 장의 티켓.

그 티켓을 손에 쥐는 순간, 스스로에게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은혜답게 살기로 작정했구나, 이제 그 다짐을 실천하는구나!' 싶어서.

3일간의 연휴에 친구나 지인을 불러내는 것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애써 동행을 찾지 않았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잘 노는 나를 대면하고 싶었다. "뭐 먹을까? 뭐 할까? 영화 어땠어?" 끊임없이 질문하며 상대의 마음을 살피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의 속도에만 집중하는 편안함을 선택하고는 '나, 참 잘했다, 정말 잘했어.' 스스로의 어깨를 토닥여본다.


영화관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산책하다가 산뜻한 간판의 순댓국집에 들어섰다. 연휴 첫날 오후 1시. 손님이 다녀갔는지 몇 테이블에 흔적이 남아있고 식당은 고요를 물리치고자 했는지 팝송이 흘러나왔다. '나 마음 편히 먹으라고 손님을 싹 비워주셨나 보네.'이 또한 기분 좋은 착각을 한다.

문득 나의 '혼밥' 역사가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30대의 나는 인사동 골목의 근사한 이탈리아 식당에서 "창가 자리로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40대의 나는 춘천의 빕스(VIPS)에서 홀로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까지 야무지게 즐기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50대의 나는 지금, 순댓국 집에 앉아 있다.

요즘이야 혼밥이 자연스러운 문화라지만, 나의 30대 시절을 생각하면 조금 별난 구석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참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러 올라가기 전, 카페 'Behind U'에서 커피 한 잔을 샀다. 벽에 걸린 나비 액자 작품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카페 주인이 자신의 친구가 작가라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설명을 건넨다. 낯선 이와 나누는 짧고 다정한 대화. 그 온기를 품고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홀로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나 자신과 나누는 가장 깊은 대화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오후다.


영화 <신의 악단>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적절한 재미가 더해져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기독교인을 흉내 내려다 진짜 믿음을 갖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에 웃다가도 이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탈북민 출신 유튜버 윤설미 씨가 왜 그토록 감동적이라 말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내가 무심코 듣고 부르던 찬양이, 매일 읽는 성경과 기도가 얼마나 크나큰 은혜인지 새삼 깨달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는 이 자유함 속에서, 나는 그간 그 간절함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특히 영화 속에 흐르던 찬양들은 평소 내가 힘들 때 의지하며 자주 듣던 곡들이라 더 깊이 와닿았다. 스크린 너머의 간절한 목소리가 내 일상 위로 겹쳐지며, 잊고 있던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 영화를 좀 더 많은 사람이 영화관에서 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울림을 느꼈으면 해서, 큰딸에게 그리고 정성스레 찰밥을 건네주시는 권사님께도 서둘러 추천의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였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시간. 나를 대접한 아침 식사부터 그를 향한 인사, 그리고 영혼을 채운 영화 한 편까지. 충만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집, 비로소 평안한 저녁을 맞았다.


3월의 첫날, 조금 늦은 걸음이었지만 새벽기도회에 다녀왔다.

어제 보았던 영화 <신의 악단>의 여운 때문이었을까. 나의 기도는 더 이상 내 가족의 울타리에만 머물지 않고 더 넓은 곳으로 뻗어 나갔다.

탈북민들의 아픔과 북녘 땅에서 숨죽여 신앙을 지키는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의 축복이 닿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또한 꽃다운 20대 청춘을 국방의 의무에 다하고 있는 청년들을 떠올렸다. 자유를 잠시 구속당한 채 나라를 지키는 그 귀한 아들들 덕분에 내가, 우리가 오늘 같은 평안을 누림을 감사했다. 자식 군대 보내놓고 애간장을 태울 부모님들의 마음에도 위로가 닿기를, 그리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겠노라 다짐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삼일절이다. 태극기를 게양하며 이 땅의 자유를 위해 흘리신 순국선열들의 값진 피를 기억해 본다. 당연하게 누려온 모든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간절함과 희생으로 일궈낸 선물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감사는 감사를 불러온다고 했던가. 떠올려 보니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수많은 일상에 대하여 반성과 함께 큰 감사임을 고백한다.

나를 위해 차린 식탁, 그가 잠든 공원에 놓인 따뜻한 흔적들, 그리고 혼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용기까지. 이 모든 평범한 행복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정성껏 살아내는 '은혜로운' 일상을 이어가고 싶다.

식탁에 놓인 주황색 장미 세 송이가 활짝 피어나고 있다. 내 생활이 다시금 활짝 피어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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