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고의 서프라이즈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남편의 생일에 이토록 진심이 된 것은.
그간 딱히 소홀했던 기억은 없지만, 혹여나 그에게 서운함으로 남은 생일이 있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되짚어보곤 한다. 그래서인지 매년 남편의 생일이 다가오면 나는 꽤 오래전부터 특별한 이벤트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9월 초가 생일인 그를 위해 이르면 봄부터 설레다가, 여름의 열기에 잠시 잊을 때 쯤이면 한 달 전부터 다시 부랴부랴 궁리에 빠진다. 내가 이토록 생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의 일상을 내 손으로 직접 특별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함께 공유하는 재미난 추억이 쌓여 우리의 이야기가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하다. 작년 12월부터 벌써 그의 생일 고민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더운 날을 피해 봄에 생일 파티를 당겨서 해볼까?'
'친구들을 초대하고 출장 뷔페를 부르면 어떨까? 현수막과 꽃도 빠질 수 없지.'
푸른 잔디밭 위로 테이블이 놓인 풍경을 상상해 본다. 아, 어쩌면 그는 너무 번잡스럽다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성대하게 해 버리면 환갑 때는 대체 무얼 해야 하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스치지만, 초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가만 보면 나도 참 일을 만드는 데 선수다.
상상만으로도 벅차할 것을 알면서도, 그 즐거운 파티 장면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마음은 충분히 행복해진다.
'그럼, 이걸 5월 결혼기념일에 해볼까?'
남편의 9월 생일을 미리 고민하다 상상은 엉뚱하게도 5월의 결혼기념일로 튄다. 우리 둘의 시간을 축하받는 즐거운 파티로 마당에 하얀 커튼을 드리워 분위기를 잡고, 곳곳에 화사한 꽃들을 놓는 상상.
언젠가 나는 기어코 이 일을 저지를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여간 이벤트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1월 중순. 사실 우리 집에서 생일이 가장 빠른 건 나다.
남편의 이벤트를 위해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 보면, 남들이 자랑해 놓은 화려한 생일 파티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럴 때면 슬쩍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나도 이런 거 한번 받아보고 싶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괜히 그이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며 말했다가 핀잔이라도 들으면 서운함만 만들게 되니, 참았다.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적어도 미역국 하나는 끓여주지 않는가.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남편이 수상했다. 한두 달 전부터 유튜브로 자동차 리뷰를 열심히 찾아보더니, 12월의 어느 날 시승 신청을 해보자고 제안하는 게 아닌가. 따스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우리는 조카 결혼식을 마치고 시승 센터로 향했다.
"사준다는 거 아니야. 그냥 좋다니까 한번 타보고만 싶은 거야."
"당연하지. 이 비싼 차를 어떻게 사. 그냥 한번 타보는 거지!"
우리는 안다. 이 대화가 얼마나 평범하고도 즐거운 유희인지.
몇 년 전, 그의 차를 바꾸기 전에 우리는 감히 바라보기도 벅찬 수입차들을 '시승'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누려보곤 했었다. 잊고 지냈던 그 소소한 재미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굳이 나를 운전석에 앉혔다. 고가의 수입차인 데다 내 차도 아니니, 사고라도 날까 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채로 도로를 달렸다.
계약은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는 딜러의 말에 남편은 내게 눈짓을 보냈다.
"절대 사준다는 거 아니야. 그냥 얼마나 하는지 알아보는 것뿐이라니까."
취소할 거라는 그 말을 믿으며 나는 남편과 함께 딜러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내 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남편이 툭 던지듯 말을 건넸다.
차가 곧 출고될 예정이라고, 이게 내 생일선물이라고.
덜컥 겁이 났다. 여러 번 생각해도 너무 과분한 선물이었다. 우리가 애써 모은 돈을 자동차라는 소모품에 쏟아붓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에 망설이는 내게, 남편은 평소보다 힘주어 말했다.
"두 아이 낳아 잘 키워주고, 우리 가족 위해 애써줘서 고마워. 당신 이 차 탈 자격 충분해. 지금 아니면 못 사줄 것 같아서 취소 안 했으니까 그냥 타."
고가의 선물이라서 감동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 거스를 수 없는 단단한 마음을 담아 건넨 그 진심이 고마워 목 끝이 뜨거워졌다.
그동안 내가 남들의 SNS를 보며 부러워했던 이벤트들은 사실 이보다 훨씬 작았다. 그 소박한 이벤트들조차 내겐 과분하다 여겼는데, 남편은 내가 상상하던 범위를 한참이나 뛰어넘어 버렸다. 그는 언제나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너무 놀라 막 좋아할 수도 없을 만큼 얼떨떨한 와중에, 나는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여보, 이걸 기념하게 현수막 하나만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현수막? 그래, 그게 좋겠네."
자동차 인도 날 아침, 남편은 급하게 주문한 현수막을 찾아왔다.
조명 아래 눈부시게 반짝이는 새 차의 보닛 위로 현수막을 펼쳤다. 마치 맞춤옷처럼 사이즈가 딱 맞았다.
누가 더 행복한지 가릴 수도 없을 만큼 환한 미소로, 그는 나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우리는 나란히 서서 셔터를 눌렀다. "오래오래 기억해야지."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딜러님도 곁에서 행복한 미소를 보태주었다.
각자의 차를 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40분 남짓한 시간은 감사와 감동으로 가득 찬 드라이브였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처럼, 우리가 함께 보낸 지난 세월이 주행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반짝이며 환했던 수많은 날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체 그는 언제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했던 걸까?’
사랑하는 마음을 자로 잴 수 있을까. 그 무게를 저울에 달 수 있을까. 서로를 챙기는 마음은 결국 서로에게 가 닿고, 기쁨은 또 다른 기쁨을 만들고자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동안 나는 그를 위해 작고 자잘한 기쁨들을 선물해 왔다. 어쩌면 그는 그 기쁨을 충분히 누려본 사람이기에, 이토록 커다란 기쁨을 만드는 법도 아는 것이리라.
나를 향한 그의 진심을 확인하고 나니, 나의 즐거운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마음을 가득 담은 선물을 주고 싶은데, 이번엔 또 무엇으로 그를 웃게 해 줄 수 있을까.
'올해 그의 생일엔 정말 무엇을 해줘야 할까?'
서로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주던 오 헨리의 단편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 속 부부가 자꾸만 생각나는 요즘이다.
지난 2024년 1월 27일 블로그에 쓴 글을 다시 읽으며, 그와 함께 한 우리의 시간을 추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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