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내 꿈은 그의 꿈이었습니다.

멈춤의 시작, 그리고 못다 한 꿈의 기록

by 본비 은혜

과거. 2015년 11월 8일 자정 넘긴 1시 20분

온종일 비가 내리고, 토요일 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웃다가 눈물 닦다, 또다시 웃다 울다 하다가 채널을 돌려 KBS1에서 "멈춤"은 시작되었다.


요즘 우리 클래식계의 큰 이슈, 큰 성과를 올리며 떠오르는 큰 별 <조성진>의 쇼팽콩쿠르 갈라 콘서트를 봤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우승자로 뉴스에 소개되어 내심 그 연주가 궁금하던 차였다.

혹시나 동영상이 어디 없을까 하고 찾기도 했었는데, 채널 돌리다 요즘 말로 득템을 했다.


뜨는 큰 별의 위엄은 내년 2월 2일 예술의 전당에서 있을 공연 예매가 티켓오픈 50여 분 만에 2500석이 모두 매진이 되는 매우 드문 사례를 냈다고.

왜 아니겠는가? 귀 어두운 나 조차도 듣고 싶었는데. 실황을 보기 전에도 말이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밤 깊어 TV소리조차도 조심스러운 시간에 볼륨을 살짝 올려봤다.

빗소리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에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이런 설렘을 마주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화면 속, 쇼팽곡을 연주하는 그의 희고 정갈한 손은 예술가의 예민하고 날카로움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기에 충분했다.

흰건반과 검은건반을 쉴 새 없이 옮기며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닌, 그가 마음으로 몸으로 연주하는 것 같은 그의 곡은 가슴이 절절하게 애달프고 설렌다.


깊이와 거리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부끼는 노스탤지어의 향수를 꺼내오는 촉매제다.

기교를 넘어 마음의 울림을 전하는 그에게, 허락만 된다면 그 손에 입맞춤하며 감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Op. 11) 이 곡은 내게 세상의 모든 것에의 "멈춤"을 주는 신호 같다.


나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문.

잊었던 나를 찾게 하는 힘.

서툰 나를 비로소 사랑하게 만드는 연민.


연주자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온 열정을 건반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온 에너지를 다 쏟음에, 나의 에너지도 빨려가는 듯하다.


바르샤바로부터 선으로 나에게 와서 면으로 보여주고 소리로 울리는 청자와 연주자와의 에너지 합일점을 이뤄낸다.

쇼팽곡을 가만히 들으면 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샘이 자극된다.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이고 절정이다. 나에게는 그렇다.


언제 적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클래식으로 태교 하셨을 리 만무하지만 어찌 되었던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가슴이 절절하다.

가슴 골짜기 저기에 숨겨두었던 슬픔이 승화되는 듯함을 느낀다.

무엇 에인지 모를 환희도 동반되어.


나에게 "멈춤"을 주었던 실황은 진작 끝났고,

러시아 예프게니 키신의 연주곡으로 다시 쇼팽곡을 만난다. 반복을 거듭하며.


깊은 가을밤.

대지는 종일 내린 비로 촉촉하고,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려 지면을 적신다.

밤비는 여전히 대지를 적시고 있을까?



또 과거. 2015. 12. 1. 10.30


내 꿈은 그의 꿈입니다.

처음 들었던 쇼팽의 협주곡이 아니건만,

그날따라, 그의 연주가 내 가슴을 사무치게 해 글을 썼지요.

나의 벅찬 감정을 다 담아내지 못한 글을, 그가 읽었습니다.


나는 새벽 2시에 잠들었는데,

새벽 3시 30분이 지나도록 잠들지 못하는 그가,

내 글을 읽고는 내가 쇼팽곡에 감동한 것처럼, 그가 내 글에 감동했는지 내 손을 자꾸만 쓰다듬습니다.

한참 꿈속에서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시중을 들면서 무엇인가 아버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실 것 같았는데, 그 말씀을 듣고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그가 자꾸만 손을 잡아서 내 꿈을 깨웁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꿈에서도 반가운 아버님을 놓친 게 아쉽기만 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까닭을 알 리 없는 그는 깨워서 우는지 당황해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을 잡고 말합니다.


"글을 읽었어. 우리 여보, 글 참 잘 쓴다.

여보 책 내줄게, 글 열심히 써.

내가 책 내줄게. 내가 사서 가지면 되니까.

돈이 얼마 들든지 꼭 책 내줄게."


그건 나의 꿈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내 꿈을 이루어준다고 합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말해 본 적 없는 소망인데.


저는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할 때는

어김없이 하는 기도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저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주시길 원합니다.

남편을 가장으로 세우셨으니 그 어깨가 힘들지 않게 해 주시고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를 세워주시라고요.

하나님의 복이 그의 손을 통해 우리 가족에 임하길 원하는 기도이지요.


저의 작은 바람도, 원대한 꿈도 그 손길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신 것을 알기에 감사드립니다.

남편에게 말 한 적 없어도 느껴지고 마음에 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열심히 묵상하고 사색하고 글을 쓰며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저에게 마음을, 감사를 글로 적는 재능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기도합니다. 그의 꿈을 이루어주세요.




현재. 2026.3.18. 오늘.


그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제 곁을 떠났습니다.

곁에 있을 때 그 꿈이 여물도록 충분히 돕지 못한 것이 가슴 한 구석에 앙금처럼 남아 있습니다.

오늘, 글을 쓰고 싶어서 나의 메모장을 보니 그의 꿈이 명확하게 적혀있네요.


내 꿈은 이제 오롯이 내 꿈이 되었어요.

나 스스로 이루어 가야 할 꿈으로요.

누구를 위할 생각도, 기댈 생각도 말고 스스로 해쳐가야지요. 그래야 더 뿌듯한 성취가 되겠지요.

잊고 살았던 그의 진심을 다시 확인한 것만으로도 오늘 밤 저는 그 무엇보다 값진 '득템'을 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롤프 메르쿨레의 말처럼, 저는 이제 누구와 경쟁하지 않는 저만의 즐거운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즐거움 속에서 나의 꿈도, 그리고 그가 못다 이룬 꿈도 함께 완성해가고 싶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이제 저에게 확실한 동기부여이자, 그와 연결되는 고귀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저녁입니다.

오늘 조성진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나직이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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