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디 이야기
매연 자욱한 19세기 중반의 런던. 주 6일, 하루 14시간씩 기계를 돌리던 노동자들에게 일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들은 찌든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생애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전당포에 맡겨둔 은제 회중시계도 찾아와 주머니에 넣습니다.
일명 '선데이 베스트(Sunday Best)' 일요일만큼은 공장의 부품이 아니라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해 그들은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당당하게 교회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겉모습 속에는 눈물겨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당시 런던 최하층 노동자의 삶은 처참했습니다. 집이 없어 4 페니를 내고 구세군 관짝(Coffin bed)에서 자거나, 그마저 없으면 2 페니를 내고 벤치(Hangover)에 줄을 매달아 기대자는 신세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품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신분 보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해야 공장주의 눈에 들어 취업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고, 지역 커뮤니티에서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조차 자릿세를 받았고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했기에, 노동자들에게 '선데이 베스트'는 신앙심의 표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갑옷이었습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울(Wool) 소재 맞춤 정장은 3~5파운드. 일당이 고작 0.15파운드였던 노동자가 사려면 꼬박 몇 달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했습니다. 이때 요크셔 지방의 섬유 업자들이 쓰레기로 가짜 정장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생 모직, 쇼디(Shoddy)의 시작입니다. 업자들은 넝마주이들이 수거한 헌 옷이나 자투리 원단을 분쇄기에 넣고 갈가리 찢었습니다. 이렇게 나온 1~2mm 길이의 짧은 단섬유(Short fiber)에 돼지기름을 먹인 다음 다시 실을 짜서 저가 원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실을 짠 방식은 나름 고급이었습니다. 악덕업자들은 공정을 더 단순화하기 위해 거즈 같은 얇은 면이나 싸구려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로 분쇄한 단섬유를 깔았습니다. 그런 다음 아교와 돼지기름을 섞어 만든 접착제 통에 푹 담그고, 후속하여 뜨거운 롤러로 강하게 눌러 압축했습니다.
수분이 날아가고 아교가 딱딱하게 굳으면, 겉보기엔 멀쩡한 모직 원단처럼 보이는 최저가 쇼디가 탄생합니다. 비록 마분지처럼 뻣뻣하고 광택은 조잡했지만, 가격이 1파운드도 안 되었기에 노동자들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쇼디 정장을 입고 당당하게 교회에 갈 수 있었지만, 런던의 날씨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거나 습도가 높은 날, 쇼디는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원단을 지탱하던 아교가 빗물을 머금고 접착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옷은 찐득하게 변했고 붙어 있던 섬유 먼지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습니다. 심한 경우 고착되지 않은 검은색 염료가 흘러내릴 정도였습니다.
결국 쇼디는 노동자의 지출을 줄여주지 못했습니다. 비 한 번에 망가진 옷을 대신해 또다시 새 옷을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질 나쁜 물건을 반복해서 구매하느라 결과적으로 부자보다 더 많은 돈을 써야 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쇼디 정장은 단순한 사기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돈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지킬 수 없다"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 바스러지는 옷을 입고 수치심에 떨어야 했던 노동자에게 자유방임주의란 인간이 되기 위해서조차 도박을 강요하는 이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