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별의 럭셔리, 소련 주얼리 이야기

by 김익규

회색빛 건물, 끝이 보이지 않는 배급 줄, 투박한 생활용품.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이미지입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명품이나 주얼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철의 장막 뒤편, 소련 인민들의 삶은 황금빛 욕망으로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앞장서서 인민을 위한 보석을 생산했고, 사람들은 무너지는 화폐 대신 금반지를 사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브랜드 로고는 없었지만, 공장 번호 하나만으로도 명품 대접을 받았던 그 시절, 소련의 주얼리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전시된 소련제 럭셔리 귀금속 품목들 (출처: miuz.ru/history/)

브랜드 없는 명품 공장



소련에는 샤넬도 티파니도 없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국영 공장들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 보석 공장은 제정 러시아 시대 황실 공방의 후예들이 만든 곳입니다. 기본적으로 인민의 결혼 예물을 만들던 곳이지만 특별한 디자인도 선보였지요. 이곳의 전매특허는 튤립 세팅(Tulip Setting)이었습니다. 보석을 금속 틀 깊이 박는 대신, 튤립 꽃봉오리처럼 높게 띄워 올리는 기술이었죠. 덕분에 작은 보석도 사방에서 빛을 받아 서구의 반지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튤립세팅 주얼리 (출처: What kind of jewelry did Soviet women wear? (PHOTO), GATEWAY TO RUSSIA)


스몰렌스크 크리스털은 소련 다이아몬드의 거점이었습니다. 서구 기업들이 다이아몬드 중량을 늘리기 위해 컷팅 비율을 희생할 때, 소련은 원석의 60%를 깎아 버리더라도 수학적으로 완벽한 '아이디얼 컷(Ideal Cut)'을 고집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의 비효율성이 서구 부호들도 탐내는 러시안 컷이라는 최고급 다이아몬드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소련 주얼리 (출처: Soviet USSR Russian VINTAGE Rose + White Gold 583 18 Diamonds Ring TW 0,54 c


우랄산맥에 위치했던 스베르들롭스크(우랄)는 공장이자 거대한 과학 연구소였습니다. 이곳의 주력 상품은 놀랍게도 합성 보석이었습니다. 레이저나 군용 무기에 쓸 단결정을 연구하던 기술로, 완벽한 색감의 합성 루비와 에메랄드를 만들어냈습니다. 소련 어머니들의 보석함에 있던 그 붉은 루비는 사실 당대 소련 과학 기술의 자부심이었습니다

합성 루비가 세팅된 소련 주얼리 (출처: USSRJewelry.com)


러시안 로즈 골드



소련 여성들의 손에 끼워진 금반지는 유독 붉은빛이 돌던, 일명 러시안 로즈 골드라 불리는 14K(금 함량 58.3%) 합금입니다. 특이한 점은 구리 함량이 무려 33.5%나 된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금보다 붉은색이 강한 이유죠. 왜 이렇게 구리를 많이 넣었을까요? 바로 '강인함' 때문입니다.


노동과 가사를 병행해야 했던 소련 여성들에게, 쉽게 찌그러지는 무른 순금은 사치였습니다. 구리가 잔뜩 들어간 이 단단한 붉은 금반지는 수십 년의 고된 노동에도 끄떡없이 그녀들의 손가락을 지켰습니다.

소련 표준 금합인 14k 583 합금의 홀마크 (출처: USSRJewelry.com)


금을 향한 사투



소련 인민들에게 주얼리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습니다. 언제 휴지 조각이 될지 모르는 루블화를 대신할 유일한 안전 자산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영 상점의 진열대는 늘 비어 있거나, 인기 없는 호박 브로치만 굴러다녔습니다. 그래서 인민들은 금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주얼리를 구경하는 여인들 (출처: The Soviet jewelry every woman had to have (PHOTOS)) ​

대중적인 방법 중 하나는 신혼부부 특권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혼인 신고를 한 부부에게만 특별 상점 출입 쿠폰을 주었습니다. 이곳엔 그나마 물건이 있었기에, 금반지를 사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습니다



특권층은 더 비밀적인 통로인 '베료즈카'를 이용했습니다. 일반인은 출입조차 불가능한 이곳은 인민에게는 비공개인 수출용 최고급 주얼리가 있었지만, 오직 미국 달러로만 결제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적성국인 미국의 달러가 있어야 소련 최고급 주얼리를 살 수 있었던 셈입니다.



암시장 또한 공공연한 구매처였습니다. 여기서는 치과용 금합금과 외교관이나 해외 파견 노동자들이 빼돌린 물건들을 구할 수 있었는데, 경제에 눈을 뜬 소련 인민들은 월급으로 암시장 금 품목을 모았습니다. 다만 암시장에는 구리와 베릴륨 합금인 란돌(Randol) 합금도 섞여 있어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맺으며



소련은 표면적으로는 사치를 부르주아의 악습이라며 배격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이념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었습니다.


러시아 할머니의 거친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투박하고 붉은 금반지.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격동의 시대를 견뎌낸 생존의 훈장이자 인민들이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었던 최후의 화폐였던 셈입니다.

삶의 증거가 담긴 소련제 금반지 (출처: USSRJewel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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