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귀족들의 럭셔리 공예품

파베르제의 겨울 달걀

by 김익규

기독교 신자에게 부활절은 아주 중요한 행사입니다. 특히 부활절 축일이 다가오면, 관련 종교단체에서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소품인 달걀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기독교 종파 중에서도 유독 부활절을 성대하게 기리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 정교회지요. 러시아 정교회 전통에서는 부활절 축일 날달걀을 붉게 칠해 예수의 피를 은유합니다. 또한, 교회 차원에서 붉게 칠한 달걀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평등과 구원을 기원했습니다.



​다만 제정 러시아 말기의 황제들은 이 소박한 종교 행사를 매우 호사스럽게 즐겼는데, 그 결과물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러시아 황실의 '부활절 달걀'입니다. 당대 최고의 러시아 황실 보석상이었던 파베르제가 주문을 받아 제작했기에 '파베르제 달걀'이라고도 불리지요.

파베르제의 부활절 달걀 컬랙션 (출처: Fabergé Eggs: The World’s Most Legendary Easter Tradition, Decor) ​

부활절 달걀의 탄생 비화



부활절 달걀이 화려한 보석 공예품으로 탄생한 계기는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황후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황후의 고향인 덴마크의 보석 달걀에서 영감을 얻어 보석상 파베르제에게 특별한 주문을 넣은 것입니다.

가장 처음 제작된 달걀인 암탉달걀 (출처: Fabergé Eggs: The World’s Most Legendary Easter Tradition, Decor)

​그렇게 탄생한 첫 번째 달걀, 일명 '암탉 달걀'은 겉보기에는 무광 백색 에나멜로 칠해져 있어 실제 달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달걀을 열면 황금 노른자가, 황금 노른자를 열면 암탉이, 암탉을 열면 황실 보석 미니어처가 숨겨져 있어서 받는 사람에게 완벽한 '서프라이즈'를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황후가 크게 감동하며 기뻐하자, 황제는 이 달걀 시리즈를 매년 주문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알렉산드르 3세 사후,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가 권좌에 오르면서 달걀 시리즈는 갈수록 화려해지고 거대한 황실의 위용을 과시하는 장치로 변모해 갔습니다.



절망 속에서 탄생한 보물



니콜라이 2세 치하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패해 극동 지역의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내부적으로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 이반이 뚜렷했습니다.


황실가문 300주년 기념 겨울달걀 (출처:This Rare Fabergé Egg Might Set a World Record at Auction for the Third Time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황제는 로마노프 황실 가문의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극도로 이례적이고 사치스러운 부활절 달걀을 주문했습니다. 파베르제가 남긴 50여 개의 부활절 달걀 시리즈 중 가장 고가로 알려진 겨울 달걀(Winter Egg)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달걀 내부의 꽃(출처:This Rare Fabergé Egg Might Set a World Record at Auction for the Third Time in Its Hist

기존의 달걀들과 달리 반투명한 얼음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무려 단단한 백수정을 1mm도 안 되는 두께로 깎고 연마해 구현해 낸 것입니다. 달걀 내부에는 수정과 귀금속으로 제작된 정교한 꽃바구니가 들어 있습니다.


달걀표면 확대(출처: Gifted by Emperor Nicholas II to the Dowager Empress Maria Feodorovna on Easter Day, 191

이 보물을 만드는 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수정은 귀금속보다 경도가 높고 충격에 쉽게 깨지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극한의 작업이었죠. 또한, 표면에는 의도적으로 패턴을 새겨 넣어 빛을 왜곡시키고 서리가 낀 듯한 효과를 완벽하게 연출했습니다.


빙산 모양 스텐드(출처: Gifted by Emperor Nicholas II to the Dowager Empress Maria Feodorovna on Easter Day, 1

조각된 수정 위에는 눈송이 모양의 플래티넘 프레임을 정교하게 끼워 넣고, 3,000개가 넘는 다이아몬드를 세팅했습니다. 달걀을 받치는 스탠드 또한 수정을 조각해 녹고 있는 빙산을 묘사했습니다.


달걀 내부의 꽃(출처: Gifted by Emperor Nicholas II to the Dowager Empress Maria Feodorovna on Easter Day, 19

달걀 내부의 꽃은 불투명한 백수정을 조각한 후, 순금 와이어로 줄기와 꽃술을 표현하고 연옥으로 잎사귀를 묘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보다 반짝임이 강한 희귀 보석인 데만토이드 가넷(투명한 연두색을 띠는 가넷 광물의 일종)을 세팅해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달걀이 보여주는 애잔함

시베리아 철도가 서프라이즈인 부활절 달걀, 1900년 제작(출처: Trans-Siberian Railway exhibition to show Faberge gems, bbc)

디자인적으로 볼 때 겨울 달걀은 종전의 달걀들과 큰 차이를 보입니다. 니콜라이 2세는 집권 이후 달걀 내부의 서프라이즈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같은 황실의 위대한 업적을 강조하곤 했지만, 겨울 달걀은 그 어떠한 위업이나 업적도 과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 그리고 해빙 후 찾아오는 생명 탄생(봄)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겨울(달걀)을 지나, 해빙 후 마침내 봄이 와서 생명(꽃)이 탄생한다는 은유였죠.


​이러한 미학적 전환은, 거세지는 혁명의 불길과 암울했던 러시아의 현실 속에서 황제가 진정으로 보고 싶었던 희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해 묘한 애잔함을 자아냅니다.



맺으며: 혁명의 불길에 녹아내린 겨울



겨울 달걀이 제작된 다음 해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의 수렁에 빠진 러시아는 결국 국고가 바닥나고 민심 이반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습니다.


1915년에 제작된 달걀인 적십자 달걀, 종전과 달리 단순한 디자인에 은과 같은 저가 금속을 사용함.(출처: Fabergé Eggs: The World’s Most Legendar

악화되는 여론을 의식한 것일까요? 러시아 황실은 1915년부터 값비싼 보석 대신 은이나 강철 같은 소박한 소재로 달걀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황실의 파멸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하면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비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황실의 달걀을 모두 몰수해 보관했지만, 1920년대 들어 외화가 극히 부족해지자 서방 세계에 이 달걀들을 포함한 황실의 보물들을 내다 팔아 자금을 충당했습니다.


​한 제국의 찬란했던 영광과 덧없는 몰락을 그 어떤 역사책보다도 서늘하게 증언하고 있는 이 보석 달걀들은, 지금도 전 세계의 박물관과 부호들의 금고 속을 떠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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