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귀족들의 럭셔리 공예품

티푸의 호랑이

by 김익규

2020년, 이란은 정교하게 제작된 미국 주력 항공모함과 함재기 모형을 호르무즈 해협에 띄웠습니다. 그리고 국영 방송사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미사일을 쏟아부어 모형 항공모함을 처참하게 박살 냈습니다..


​2024년 러시아 또한 비슷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노획한 서방의 전차들을 파괴된 상태 그대로 모스크바의 공원에 전시한 것이죠.


​이렇듯 국가 지도부는 종종 적성국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국민들의 자존심과 적대감을 고취시키고, 지도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지요. 놀랍게도 과거의 국가들 또한 이런 적국 조롱 퍼포먼스를 왕실 차원에서 벌였습니다.

미국 항공모함 모형을 박살내는 이란의 퍼포먼스 (Iran Looks Set To Blow Up Its Fake Aircraft Carrier Again, The TWZ Newsl
우러전에서 노획한 서방 전차가 모스크바에 전시된 모습 (출처: Russia flaunts Western military hardware captured in war in Ukra



마이소르 왕국과 영국간 전쟁

18세기 후반, 영국의 인도 침공은 더욱 노골적이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동원해 인도 남부에 위치한 마이소르(Mysore)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무려 30년 동안 4차례에 걸쳐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 사이에서 피 튀기는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영국은 당대 최고의 최강대국이었으나 마이소르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이소르를 이끌던 '티푸 술탄(Tipu Sultan)'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유럽의 무기와 최신 기술, 심지어 유럽의 경제 시스템과 사상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근대화된 마이소르는 1780년대 벌어진 동인도회사와의 2차 전쟁에서 로켓 부대를 동원해 영국군을 패배시킬 정도였습니다.


​티푸 술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위한 최첨단 기계장치를 기획합니다. 영국군을 잔인하게 찢어발기는 모습을 담은 공예품을 궁전에 전시해 왕권을 과시하고, 상징적인 승리를 선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티푸 술탄 (출처: Tipu's Tiger, Victoria and Albert Museum)


증오와 기술이 결합된 오토마타


티푸의 호랑이 (출처: Tipu's Tiger, Victoria and Albert Museum)

이렇게 탄생한 기괴한 공예품이 바로 '티푸의 호랑이(Tipu's Tiger)'입니다. 영국에 대한 티푸 술탄의 뼈저린 증오와 당시 최첨단 기계공학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기계장치로, 마이소르 왕국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영국군을 물어뜯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내부의 파이프 오르간 (출처: Tipu's Tiger, Victoria and Albert Museum)

이 공예품의 본질은 스스로 움직이는 태엽 인형인 오토마타(Automata)입니다. 인도에 자생하는 잭우드(Jackwood)를 가공해 만든 외관 내부에는 프랑스 기술의 영향을 받은 정교한 기계장치와 음향장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목재 겉면에는 여러 겹의 유색 옻칠로 채색하여 공포에 질린 영국군과 맹렬한 호랑이를 원초적인 느낌으로 표현했습니다.


영국군 얼굴 (출처: Tipu's Tiger, Victoria and Albert Museum)
측면 핸들 (출처: Tipu's Tiger, Victoria and Albert Museum)

공예품 측면의 핸들을 돌리면 내부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며 호랑이가 영국군을 물어뜯는 움직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와 동시에 내부의 풀무가 파이프 오르간에 공기를 불어넣으면서, 움직임에 맞춰 병사의 끔찍한 비명 소리와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뿜어냅니다.


즉, 이 공예품은 호랑이에게 물어 뜯겨 죽는 영국군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는 선전물이자, 적을 향한 왕의 맹렬한 증오를 표현한 기계 장치입니다.



티푸의 호랑이에 얽힌 잔혹 실화


이 호랑이 오토마타에는 티푸 술탄의 영감을 자극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1792년에 발생한 먼로 사건 이죠.


이 사건은 17세의 사관생도였던 서덜랜드 먼로가 인도 앞바다의 사가르 섬에서 사냥을 하던 중,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머리가 뜯겨 사망한 실화입니다. 특히 죽은 먼로가 마이소르를 침공한 영국군 사령관 헥터 먼로(Hector Munro) 장군의 가문 사람이었기에 영국 사회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헥터 먼로 (출처: Hector Munro, 8th Laird of Novar, Wikipedia)

마침 1792년은 마이소르가 영국과의 3차 전쟁에서 패배해 영토의 절반을 빼앗기고, 티푸 술탄이 자신의 어린 두 아들을 영국군의 볼모로 보내야 했던 치욕적인 해였습니다.


영국 측 기록에 따르면, 적장의 아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먼로 사건은 티푸 술탄에게 엄청난 희열을 안겨주었고, 이 통쾌한 사건을 영구히 박제하기 위해 이 오토마타 제작을 명령했다고 전해집니다.


​완성된 오토마타는 국왕의 훌륭한 선전 도구이자 심리적 위안거리로 기능했습니다. 티푸 술탄은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등 반(反) 영국 사절단이 올 때마다 이 작품을 과시했습니다. 심지어 술탄은 매일 오후마다 이 장치를 가동해 비명 소리를 들으며 울분을 달래고 심리적 위안을 얻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맺으며: 전리품으로 전락한 왕의 증오


티푸 술탄의 무덤 (출처: Once In A Lifetime Journey, Tipu Sultan Summer Palace in Srirangapatna, Mysore)

유감스럽게도 이 공예품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1799년 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결국 티푸 술탄은 전사하고, 마이소르 왕국은 멸망하고 맙니다.


함락된 왕궁의 화려한 귀금속과 보물들은 모조리 약탈되어 녹여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예품은 값나가는 금속이 아닌 '목재'였기에 파괴를 면했습니다. 대신 당시 영국령 인도 총독인 웰즐리가 전리품으로 챙겼습니다.


​살아남은 공예품은 제국주의 영국의 화려한 전리품이자 프로파간다 홍보물로 전락했습니다. 영국의 학자들과 작가들은 이 기계 장치가 동양 군주의 '야만적 잔인성'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런던의 동인도회사 박물관에 전시된 이 기물을 보기 위해 엄청난 대중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끔찍한 비명 소리를 들으며 영국의 위대한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티푸의 호랑이는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아 영국 런던의 V&A(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대 최첨단 기계공학의 정수이자, 적국을 향한 멸망한 왕의 처절한 증오가 담긴 저주 인형이 아이러니하게도 적국의 심장부 한복판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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