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가운데에서 마주한 질문들
여태껏 많은 책들을 읽고 생각해 왔다. 독서가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읽는 즐거움을 크게 누린 삶이었다. 오래 산 인생은 못되겠지만 여태까지의 시간을 반성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글을 써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특정 주제의 책을 취미삼아 여러 권 집필해 보았지만 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삶을 드러내는 글을 써 본적은 없었다.
삶이라는 것은 매 순간 ‘의미’로 충만해야 하기에, 젊은 날을 보내면서도 끝없이 내게 인생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 물론 그러한 물음과 대답이 과정이 늘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의 삶과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의미를 묻는 물음 속에서도 많은 기쁨과 환희, 쾌락과 고통, 슬픔과 시련, 고독과 비애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속사람’을 끝없이 들어내는 과정은 살을 찢는 아픔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누구나 걸어야 할 엄연한 인생의 길일 것이다.
젊음은 한 때이기에, 이 젊음을 소중히 하면서 내가 걸어야 할 길과 지나온 길을 회상해본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기쁨이 있었고, 많은 실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부분을 가감없이 써내려 갈 수 있다면 짧게 살아온 인생에 하나의 ‘회고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소양의 부족함 때문인지 영문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철학’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컸다. 삶의 의미를 끝없이 반추하는 것이 철학이 지닌 가치이기에, 철학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학문’이라 정의했다. 죽자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죽음을 연습한다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실천하자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나의 정신적 가치관의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철학 빈곤’의 사회로 접어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저 취직을 위한 공부, 월급을 받기 위한 직장 생활도 의미가 있겠지만 정신적 의미의 차원에서 삶에 대해 밀도 있는 ‘문제의식’을 가지는 자세가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발로에서 이 수필집을 쓰게 되었다. 33년 짧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져왔던 생각들, 일상의 경험들, 가치관들을 한 번쯤 정리하고 넘어 갈 수 있다면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반성문’이 없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료기술의 눈부실 발전 덕분에 우리 사회가 ‘장수 사회’로 접어 들고 있다.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하는데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한 존재라 ‘빵’만으로 살 수가 없는 듯하다. 길어진 인생 길에서 끝까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죽음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참다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인생을 마칠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인생은 없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인생이란 길을 걷는 일이라면 그 길 위에서 꼭 대답해야 할 삶의 물음들을 정리해 써보았다.
젊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반성문’이라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가치 빈곤의 사회에서 우리가 인생의 반듯한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생(生)의 의미를 좀 더 완성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철학(Philosophy)의 어원적 의미를 해석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정도가 될 것이다. 실제로 철학은 지혜이상의 지혜를 의미하는 삶의 가치관과 이성을 종합하는 학문이다. 세상에 많은 사랑이 있겠지만, 지혜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우리는 철학을 모든 학문의 선두이자 으뜸으로 놓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내가 즐겨하는 말 중에 ‘철학이 밥을 먹여준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반듯한 생각의 틀을 갖고 살아나가는 것이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철학을 딱딱하고 고루한 학문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일상의 생활에서 ‘생활 철학’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람마다 ‘스타일(style)’이 다르다는 말을 자주 종종 하는데, 그 스타일이란 것도 결국 개인이 갖고 있는 생활 철학의 일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우리 사회가 ‘철학 부재’의 사회로 접어드는 것 같다. 철학이 빈곤한 사회는 결코 선진 사회가 될 수 없기에, 번영의 문턱에서 한 단계 도약하려면 구성원 대다수가 삶의 ‘문제의식’을 갖고 생활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 ‘문제의식’이 너무나 빈곤한 사람들이 많아 염려스럽다. 일례를 들어보자. 여기 대학생이 2명이 있다. 정치학 전공이라 가정해보자. 그런데 같은 정치학을 전공해 4년을 보낸다 할지라도 단순히 취업을 위해 정치학과에서 4년을 보내는 것과 ‘문제의식’을 갖고 대학 4년을 보내는 것은 그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 일 것이다.
정치학 공부를 하면서도 이것이 내 삶에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정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에 정치가 인간 본성과 갖는 밀접한 연관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해온 사람이라면 같은 4년을 보낸 후에 결과가 다르지 않겠는가 .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삶에 임한다면 우리가 삶의 순간순간에 의미를 되찾고 복원하는 일을 한 층 더 깊이 있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내 생활이 갖는 의미에 대해 밀도 있는 고민을 하는 사회인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직장을 다닌다면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고민하고 탐구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 중 한 부분이기에, 삶의 차원을 높이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무일 것이다.
그러한 수준 높은 의식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많은 사회가 결국 선진사회일 것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인생의 후반부를 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철학’공부를 권하곤 했다.
“이렇게 철학에 복종하는 자는 인생의 모든 시기를 괴로움없이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철학이야말로 아무리 칭송받아도 지나치지 않을 걸세.”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1장-
노년기에 접어들지 않았더라도 인생을 살면서 정신적 풍요로움을 구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철학 공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듯한 생각의 틀을 갖고 살아나갈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과 문제의식이 없는 사회는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아프리카의 저개발 국가나 공산 사회를 떠올려보라. 잘못된 철학과 문제의식의 정신적 빈곤으로 인해 후진 사회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딱딱한 글자로 뒤덮인 철학 책을 읽자는 말이 아니다.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인생 철학’을 갖자는 요청이다. 그러한 정신적 기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인생의 길에서 요하는 많은 도전들을 어려움없이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 논란도 결국 구성원들의 정신적 빈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현실이 정신적인 소양을 갖추는 데 너무 소홀히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가정과 사회와 학교가 정신적 가치의 고양을 위해 노력해야 할 터인데 관심 자체가 부족한 것 같아 보인다. 일찍이 교육(Education)의 어원은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인데, 우리 사회는 여태껏 아이들을 끌어내지 못하고 ‘주입’해 온 것도 사실이다.
애 어른 할 것없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들이 표피적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듯하다. 명품 옷을 걸치고 외제 차를 몰고 펜트 하우스에 살지만 그에 걸맞는 ‘교양’을 갖추지 못한다면 ‘알맹이’는 비어 있고, ‘껍데기’만 가득 찬 삶이 될 것이다. 삶의 ‘알맹이’를 가득 채우는 문제의식과 생활 철학을 갖고 매일의 일상에 임할 수 있다면 한 층 더 수준 높은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끝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싶다. ‘흑백 논리’라는 것이 있다. 물리학에서 색을 규정할 때 검은색이 아니면 흰색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흑백논리’가 물리학을 벗어나와 우리 사는 세상에도 그대도 적용될까? 우리가 사는 사회 현실은 흑과 백의 이분법이 아닌 완전한 흑색도 백색도 아닌 ‘중간지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세상에 이것 아니면 무조건 저것이어야 만 하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태껏 어떤 모습을 보여 왔는가. 많은 발전과 번영을 이뤄내 선진국 반열에 들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이면에는 지나친 ‘흑백논리’와 ‘편가르기’논리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만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조선시대에도 붕당과 사화로 이루어지는 당파 싸움의 이분법 논리 때문에 어지러운 사회 현실을 겪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다 올바른 사회 철학과 문제의식이 빈곤했기에 생겨나야 했던 문제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날마다 뉴스를 장식하는 어지러운 사회 현실들, 시끄러운 정치 과정들의 ‘소음’을 듣고 있자면 누구 하나 옥석같이 반듯한 ‘철학’을 가진 지성인이 없구나 한탄하게 된다.
그러니 생각하고 살아가자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세상의 파고는 시시각각으로 덮쳐오고, 사회 변화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도 요즘의 현실이다. 이렇게 바삐 지나가는 세상일수록 나만의 단단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 인생 만의 ‘건축물’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건축물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재가 바로 자신만의 ‘인생 철학’이자 ‘문제의식’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의 함양은 우리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선택’이 아니 ‘필수’라는 요청을 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 우리가 인생을 100리 길이라 가정해 보자. 교육의 수준과 환경의 정도에 따라 우리는 100리 인생길을 ‘도보’로 걸어가는 때도 있을 것이고 ‘기차’를 타고 쌩쌩 달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마쳤다고 하면 기차를 타고 30의 길을 달린 것이며 앞으로 평생 70의 과제가 남아있겠다.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공부를 마쳤다면 50의 길을 기차를 타고 온 것이며 앞으로 50의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달려온 시간 보다 남아 있는 시간에 주목해달라는 요청을 드리고 싶다. 50정도 기차를 타고 왔다면 거기서 인생의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직도 50의 길이 남아있는 셈이다.
남보다 더 앞선 위치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랑을 늘어 놓을 필요도 없겠다. 10이나 20의 위치에서 걷기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우직하게 정진해서 100을 다 채운 사람들의 사례가 우리 사회에는 많지 않은가.
이 나라의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던 기업인들을 떠올려 보라.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의 정주영 회장의 인생 100리에서 학교 졸업장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분들은 10에서 내려 90리 길을 포기하지 않고 파고들어 삶의 의미를 완성했다. 그래서 우리가 100리 길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문제의식을 갖추자고 요청하는 바이다. 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여 인생의 배움 길이 끝난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삶의 의미를 완성해야 할 의무가 모두에게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50리 길이 남아 있을 수도, 또 다른 누구는 70리 길이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반듯한 철학과 문제의식을 정립한 채 ‘뚜벅뚜벅’정진 할 수 있다면 인생의 끝에서 큰 아름다움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3년간을 지내면서 많은 책을 읽어왔다. 독서도 습관이기에 읽는 사람은 찾아서 읽지만, 읽지 않는 사람은 쳐다보지 않는 것이 ‘책’일 것이다. 다독가(多讀家)가 될 수 있던 비결은 나의 ‘부친(父親)’의 교육 덕분이었다.
부친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책을 가까이하셨고, 평생 독서 습관을 갖고 살아오셨던 분이다. 자식은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그러한 부친의 모습을 보고 어린 날부터 자연스레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청소년기부터 많은 책을 읽을 기회를 가졌다. 내면의 풍요로움을 위해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텐데, 어릴 적부터 많은 책을 가까이 한 덕에 인생에서 정신적인 가치가 주는 아름다움을 깨닫고 살아올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도 결국 많은 책읽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많이 읽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책을 쓸 수 있는 ‘자원’을 많이 갖추었단 말일 것이다.
공부의 기본이 ‘독서’라면 우리는 독서를 걸러서는 안되겠다. 육체의 건강함을 위해 매일매일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라면, 정신의 건강함을 위해 일정한 ‘양식’을 주어야 하는데, 그 양식의 일부가 ‘독서’가 될 것이다.
공부하는 것과 독서하는 것을 별개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시험을 앞둔 학생에게 왜 학과 공부를 하지 않고 독서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잘못된 물음인 것이다. 독서 자체가 공부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읽지 않는 사회’로 가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책을 가까이하지 않고, 유투브로 대표되는 ‘영상 매체’에 의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에는 육아의 수단으로 젊은 애 엄마들이 아기에게 ‘유튜브’영상을 틀어주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뇌가 형성되고 평생을 살아갈 정신이 형성되는 유아기에 유튜브로 대표되는 영상 매체의 자극만을 받는다면 이는 아이의 정신 건강에 그리 좋지 않은 육아 방법일 것이다. 세계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선진 국가를 떠올려보라. 5개의 국가를 예시로 들자면 그 범주에는 일본,미국,프랑스,독일,영국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 이 국가들의 공통점은 국민들이 100년이상 독서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독서 교육을 받는 교양 높은 사회 구성원들이 결국 선진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만 해도 벌써 읽는 분위기가 아니다. 나는 독서야 말로 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서’하는 사람은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헌신한 운동가들도 ‘애국자’이지만, 독서를 열심히 하는 국민도 나름의 방법으로 ‘문화 애국’ 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강하게 문화 선진국을 표방하지만, 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에게 ‘책 좀 읽어라.’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절대 책을 읽지 않는다. 부모 세대가 가정에서 ‘모범’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어른들이 가정의 분위기를 ‘읽는’분위기로 바꾼다면 모든 구성원들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될 것이다.
내가 책을 아주 가까이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내 부친이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책을 가까이하면서 정신적 충만함을 유지해 올 수 있었기에 표피적인 행복보다 내면적인 행복이 주는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내 부친이 물려준 정신적 유산(流産)일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돈만 물려주는 것이 아니기 않겠는가. 이렇듯 부모는 자식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존재인 것 같다. 내가 직업 선생으로 13년 동안 살아왔기에 더욱이 독서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등생의 공통점은 결국 ‘다독가’라는 것 아니겠는가? 책을 많이 읽고 가까이하는 학생이 학업 성적도 우수하기에 여느 가정에 독서 교육을 요청 드리지만 항상 결과는 미흡하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학원 하나 더 보내지 말고, 그 시간에 책을 권하고 읽힐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공부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를 많이 해서 ‘언어적 감각’과 ‘사고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단순히 ‘국어’과목에서만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겨나듯이, 뇌에도 독서를 통해 지적인 자극을 끊임없이 가하면 정신력이 단단해 지기 마련이다.
그러한 다부진 사고력을 지닌 학생이 결국 학업도 우수하지 않겠는가.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원칙인데, 이것을 우리 사회가 놓치고 사는 것 같아 아쉽다.
책을 많이 읽어 달라고 요청하면, 보통 내게 하는 질문이 ‘그러면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합니까?’이다. 그러나 전제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책은 읽다 보면 다음번에 읽고 싶은 책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고, 관심있는 분야의 주제도 떠오르게 된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독서와 관심의 영역이 확장되는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SNS와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매체에서 주는 ‘정보’는 말그대로 자극적이고 단편적이다. 순간적으로 휙 하고 사라져 마는 정보 홍수 속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진정으로 유익한 ‘지혜’는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보화 사회이기에 정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단편적인 정보에만 매달리는 것도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데 지장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정도 이루어졌나는 의문이다.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에게 독서를 권장하는 학사 운영 체제 내에서도 그저 한학기에 특정 권수를 정해 놓고 단편적인 독후감을 제출하는 형식으로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질 높은 독서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역시 우리 교육의 환경상 독서 교육이 가장 잘 이루어져야 할 곳은 ‘가정’이다. ‘보는’가정 분위기에서 ‘읽는’가정 분위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전환은 가정 구성원 한 명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가정 구성원의 합의와 약속을 통해 새로운 가정 문화를 만들어 나가자는 동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장수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0세까지 무병장수 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사회적*육체적 기대 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년기를 맞이하는 준비와 관련하여 흔히 주식과 부동산과 재테크와 같이 ‘경제적’인 부분에만 지나치게 편중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물론 ‘경제’문제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너무 경제문제에만 매몰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최고의 노후 대비책은 ‘공부와 독서’이다. 고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 정년의 나이를 맞아 퇴직을 하고 나면 인생의 2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근래의 현실이다.
노년기를 그냥 놀면서 시간을 흘려보낸 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건강한 삶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보다도 독서를 통해 인생의 마지막까지 정신적 수양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건강하고 현실적인 노후 대비책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머물되, 정신적으로 상류층에 머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경제문제에 있어서 먹고 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고, 여유가 있다면 여가 생활을 즐길 만한 경제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문제 만을 바라보고 인생의 모든 초점을 그곳에 맞추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면 정신적 가치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 삶의 의미를 두면 어떨까. 그리고 그 정신적 가치를 함양하고 질 높은 삶을 사는데 기본 밑바탕을 ‘독서’에서 찾는다면 우리가 매번 갈망하는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질적으로 번영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자랑스럽게 마무리한 우리 나라에서 왜 이렇게 ‘정신적 공허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가? ‘가치 빈곤’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은 무엇을 하며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일부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독서’이다. 물론 책도 다 같은 책일 수는 없으니, 양질의 책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선별해서 봐야한다.
우리는 책 중의 책이라고 불리는 ‘고전’몇 권을 이름정도는 알고 있다. ‘고전’은 수천년간 시간의 ‘검증’을 거쳐 세대에서 세대로, 세계에서 세계로 전해 내려오는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담긴 ‘보물창고’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고전을 우리가 읽어낼 수 있다면 일반 서점의 베스트셀러가 줄 수 없는 정신적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전의 가치가 훌륭하다고 하여, 막상 고전을 읽으려고 하면 읽기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고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우스갯 소리가 인구에 회자되듯, 고전의 가치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지만, 누구도 먼저 선뜻 고전을 읽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한다.
많은 책을 읽어온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고전’의 가치는 바로 그곳에 있다. 고전이라는 것은 쉽게 읽히거나, 단번에 이해하겠다는 희망을 버려야 오히려 독파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례를 들어보자. 내가 큰 맘 먹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구입했다. 500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독파하겠다는 큰 꿈을 품고 읽기 시작했지만 20페이지를 넘어가니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이 책을 완결하지 못하고 20여 페이지만 읽은 상태로 포기하게 된다. 완독하지 못했기에 실의감에 빠질 수는 있겠으나, 고전을 읽어 나가는 특별한 독서법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전체 500페이지 중에 20페이지만 읽었더라도 20만큼은 남는 독서가 되는 것이다. 나머지 480의 과제는 아직 남아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여러 번 독파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모든 걸 한 번에 통달하겠다는 관점은 고전 독서에서는 무리이다.
20을 읽었으면 20만큼 남고, 40을 읽으면 40만큼 남는 것이 고전독서의 매력이다. 그래서 읽는 만큼 남으니, 실망하지 말고 계속 읽어 나갈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사람사는 모습이 몇 천년 전이나 현대의 우리들이나 다르지 않다. 내가 고전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본질은 현대의 우리와 차이점이 없다. 수 천년 전의 사람들도 스마트폰만 없었다 뿐이지 인간이라면 고민해야 하는 ‘실존’의 문제,’사랑’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항상 고민하고 살아왔고,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의 일부가 ‘고전’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이 위대한 책이고, 신변잡기 소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책 읽기를 소홀히 하는 우리 교육 환경도 문제 삼아 본다. 무조건 적인 지식 주입으로 얼마나 창의력을 끌어낼 수 있는 지 의문이다. 학교의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좀 더 모범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헌신에 더해 독서를 권장하는 학업 풍토가 조성되고 교육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 현실은 주입식으로 수십년간 진행되어 왔기에 모든 것을 한 번에 전환하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나 교사들도 본인들이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기에 교육 방법을 전환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 교육이 많은 발전을 이뤄왔지만 아직 ‘생각하기’교육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많은 시행착오 가 필요할 것이다.
교육 제도의 변화가 더디다고 손 놓고 살수 만은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부터 의식 전환을 해야 할 것이다. ‘책 좀 읽자’라는 말이 그저 지나가는 잔소리가 아닌 사회의 정신적 풍토로 뿌리내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