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다. 대선은 ‘시대정신’을 가리는 선거다. 지선과 총선은 그 시대정신의 중간평가다. 반대만으로 선거를 이길 수도 있다. 대체로 ‘싫어요‘ 경쟁이다. ‘묻지마 심판론‘이 먹힌다.
대선은 새 페이지를 여는 선거다. 지난 페이지를 채점하는 선거가 아니다. 새 페이지를 무엇으로 채울지가 중요한 선거다. ‘좋아요’ 대결에 가깝다. ‘반X연대’ 따위로는 이기기 어렵다.
시대정신은 유행이 아니다. 유행은 시대정신의 한 면일 뿐이다. 치열하게 현재를 고민하고, 끊임없이 미래에 말을 걸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잡아내는 건 어렵고 입체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많은 정치인이 유행을 시대정신으로 속인다. 게으른 탓이다. 딥시크가 터지면 AI가 검찰이 문제면 검찰개혁이 시대정신이 된다. 이는 유행에 대한 반응이지 시대정신은 아니다.
시대정신은 각 시대 주류 세대의 사명으로 발현됐다. 우리는 지금까지 네 번의 큰 시대정신의 변화가 있었다. 이런 시대정신들의 관성과 가속의 힘겨루기 속에서 우리 정치는 역동해왔다.
광복 이전 사명은 주권회복이었다. 그 당시 대한국민의 사명은 주권을 되찾아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을 이끌던 이들이 한반도 정치를 주도하는 건 당연했다.
다음은 경제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다. 산업화 세대의 시대였다. 그들은 경제 발전을 최우선에 뒀다. 산업화 세대 주도 아래 국가의 총역량이 산업화에 몰두했다.
산업화의 헌신 덕에 386 세대도 출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정상화를 견인했다. 산업화만큼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87년 체제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힘겨루기와 변주 속에서 정권은 바뀌어왔다. 노태우·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산업화의 관성을 추종해 승리했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와 산업화의 균형에 골몰했고,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민주화의 가속을 시대정신으로 삼아 대선에서 이겼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힘겨루기는 새로운 세대와 시대정신을 잉태했다, X 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상식이 된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훌륭하게 노는 게 시대적 사명이었다.
X 세대가 훌륭하게 잘 놀았던 덕분에 영화, 음악, 게임 등 전방위에서 우리의 소프트파워 수준이 크게 올랐다. K-POP과 오징어 게임, 페이커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제는 MZ 세대의 시대다. 그들은 X 세대와도 또 다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성 위에서, 문화화의 가속을 향유 해 온 대한민국의 첫 세대다.
흥미롭게 케인즈는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지금의 MZ 세대를 겨냥한 듯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케인즈는 우리 후손들이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 얻은 자유를 어떻게 누리고, 어떻게 하면 인생을 더 현명하고 알차게 잘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돈을 소유물이 아닌 삶을 즐기는 현실적 수단으로서 좋아할 것’이라고도 예측했다. 돈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것으로 봤다.
MZ 세대는 ‘존중받는 삶’ 자체를 삶의 목적이자 사회 구조의 기준으로 삼는 첫 세대일 수 있다. 꼰대 문화를 경멸하는 것도, 공무원 응시율이 하락하는 것도 이런 맥락 아닐까.
물론 MZ 세대가 경제적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의 고민과 고통은 여전히 경제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들이 많다.
하지만 '삶을 즐기는 방식'이나 '돈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전 세대와 달리 '존중'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존중이 그들의 시대정신일 수 있다.
MZ의 젠더 갈등도 결국은 존중에 관한 문제다. MZ 남성의 극우화는 ‘병역 헌신에 대한 존중 부재’와 그것을 당연시하는 관습적 태도가 그 시작일 수 있다.
MZ 여성이 거리로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유리천장과 데이트 범죄와 같은 개별 사안 그 이상의 문제다. 그런 것들에 대한 그들의 실제 공포를 존중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 연금 문제를 향한 MZ의 분노는 젠더를 가리지 않는다. 이 문제의 본질도 결국은 ‘존중 부재’다. 본인 문제를 남들이 결정한다는 건 정말 참기 어려운 ‘굴욕’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 어떤 대선 후보의 메시지에서도 이런 존중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시대정신으로 삼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여러 공약이 나오고 있지만, 산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약의 관념적 구심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안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보이나, 시대를 향한 깊은 통찰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급하게 대선이 치러진 탓도 있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정치는 행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선은 행정가를 뽑는 것 그 이상의 선거다.
행정가는 집행력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정치가는 달라야 한다. 시대정신을 포착하고, 활용할 수 있는 통찰과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갈 수 있다.
시대정신은 의제들을 잡아당기는 인력이다. 의제 속의 의지들이 모인 일반의지다. 구습과 폐단을 밀어내는 척력이면서, 의지를 현실화하는 전략적 정체성이기도 하다.
시대정신은 그 자체로 미래다. 현재의 진단이기에 미래의 방향이다. 현재에만 몰입하면 행정에 그치지만, 미래까지 고려하면 정치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은 고도의 정치행위자다.
존중을 대선의 시대정신으로 삼는다는 건 존중을 열망하는 ‘현재 세대’를 존중이 실현되는 ‘미래 사회’로 나아가게 할 방법을 제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부처 신설이 방법이 될 수 있다. ‘세대 존중부’를 만들어 세대별 미래 의제들을 참여·통섭적으로 다루는 시도가 필요하다. 국내외적이고 입체적인 미래 예측 기능이 동반되면 좋겠다.
사고의 범주를 넘어서는 미래 담론도 필요하다. 박정희의 수출과 제조업 강국, 김대중의 IT와 남북 평화처럼 당시에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 담론을 과감히 제시해야 한다.
경제도 공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모두 산업화와 민주화의 또 다른 변주일 뿐이다. 이를 넘어설 시대정신이 필요한 때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결과는 쉽지만, 과정은 어렵다.
다음 정부의 정체성이 존중이었으면 좋겠다. 존중의 시대정신 속에서 미래를 다뤘으면 한다. 현재에만 집착하면 포퓰리즘에 그치지만, 미래까지 천착하면 진짜 실용주의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