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국경을 넘어서면 주변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일단 흙길이었던 도로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산등성이의 송전탑과 입간판, 십자가등 곳곳에 인간의 손길, 삶의 흔적이 보인다. 비라코차가 갓 빚어낸듯한 태초의 원시성을 품은 알티플라노 고원의 풍경에 젖어 있던 터라 포장된 도로와 길가에 선 표지판조차 낯설다. 게다가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던 잉카전통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칼라마에서 하룻밤 묵고 산티아고로 왔다. 점차 잠에서 깨어나듯 도시의 풍경이 익숙해지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하다 현재로 돌아온듯한 느낌이 든다. 고산지역을 완전히 벗어나 평지로 내려오니 정신이 맑아진 때문일까? 여튼 이제 고산병에서 해방이다!
점심때에는 한인 식당 다미원에서 볶음밥과 탕수육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어 짬뽕을 시켜 나눠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낯익은 음식인지라 허겁지겁 먹고 나니 속이 불편하다. 욕심은 늘 탈이 나게 만든다. 나의 식탐이 참담한 결과를 불러오기 전에 서둘러 소화제를 먹었다.
산 티아고는 이번 여행동안 본 도시들 중 가장 현대적이다. 산티아고의 아르마스 광장은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과 확연히 다르다. 현대적 건물들 사이사이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이 섞여있지만, 밝고 현대적이다.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자주 마주친,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평범한 도시민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공원 초입에는 칠레 지역을 정복하고 산티아고를 건설한 발디비아 장군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기마상의 대각선 방향 공원 안쪽에는 돌로 된 원주민 기념비가 있다. 발디비아의 스페인군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려고 싸운 원주민 마푸체 족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청동 기마상이 늠름하게 서있는데 비해 원주민 조각상은 커다란 얼굴만 형체를 구분할 수 있을 뿐 돌조각의 일부가 깨어져 나간 것처럼 보여 추상작품 같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네다 대통령 궁이 있다. 모네다 궁은 정방형의 하얀 건물로, 평화롭게 오후의 정적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궁 앞에 휘날리는 십여 개의 칠레 국기를 보면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표현한 시가 문득 떠오른다. 마치 그들의 역사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1973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피노체트가 제안한 풍족하고 편안한 망명생활을 거절하고 쿠데타군에 맞서 싸웠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국민이 뽑은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배신하고 떠날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곳 모네다 궁에 머물던 대통령은 쿠데타 군의 공격을 받았다. 군대의 포격에 건물의 반 이상이 파손되었고 궁은 포연에 휩싸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아옌데 대통령은 측근들을 내보낸 다음 자결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국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지금껏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포격의 연기가 솟아오르던 모네다궁은 옛일을 잊은 듯 단정한 모습으로 조용히 서 있으나 궁을 둘러싼 국기들은 그날을 기억한다는듯한 손짓을 한다. 칠레 국가가 줄지어 서있는 광장 한쪽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후 칠레는 17년간 군부독재정권의 터널을 지나 민주적인 정부가 성립되고 군사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 긴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삶이 무너지고 영혼이 부서졌을까. 그 많은 사연들은 저 깃발 속에 담겨 서로 다른 이념의 표상인양 아우성치듯 펄럭이고 있었다.
모네다궁 가까이 있는 라 모네다 센트럴 컬처센터에서는 호세 벤투렐리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벤투렐리는 공공벽화를 많이 그렸다. 그런데 피노체트의 집권과 함께 이념적인 이유로 망명생활을 했고 주로 스위스와 중국 등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강렬하고 투박한 인상은 과거 우리나라 학생운동권 걸개그림을 연상시킨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이 남미의 민중투쟁이나 반미운동의 역사에 영향받은 면도 있으니 아마도 이쪽이 원조일터이다.
대치 중인 데모대 그림은, 1970~80년대의 우리나라 거리에서 보던 전경과 학생 시위대의 대치를 떠올리게 한다. 왼쪽 아래 쓰러진 사람과 일으켜주는 사람은 색조를 넣어 강조했는데 그 모습은 십자가에서 막 내려온 예수처럼 묘사되어 있어서 종교적인 느낌이 난다. 남미의 정신적 기반인 가톨릭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자유를 위한 희생을 예수의 죽음과 겹쳐 표현한 것 같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가 권좌에 있는 17년간 수만 명이 정치적 이유로 구금되거나 고문을 당했고 사망, 실종자는 3000여 명에 달했다. 추방되거나 정치적 망명을 택한 사람도 20여만 명이나 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당시 칠레의 전체인구가 1000만 명 남짓이었음을 감안하면 더 놀랍다.
칠레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아픔을 간직한 나라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북한의 위협이라는 변수가 있었다면, 칠레는 미국 자본의 진출을 지원하는 정치적 간섭을 극복해야 했다. 벤투렐리는 그들의 아픔을 드러내고 공유하려 한 예술가였다.
작품 감상 중 독특한 그림을 발견했다. 수묵화처럼 먹의 농담을 조절해서 그린 그림으로 붓 끝의 힘찬 획이 동양적이긴 하나 등장하는 인물과 그리는 방식은 독특하다. 벤투렐리는 중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중국 화풍, 서예에 영향받은 듯하다. 정치적 갈등이 예상치 못한 동서양 화풍의 융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산티아고에서 가장 높은 61층 빌딩 전망대에서 시내를 내려다본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 멀리 산아래까지 빼곡하게 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빌딩들 사이 도로의 폭이 좁은 곳도 많으니 오래된 도시임을 알겠다. 지진이 잦은 나라여서인지 아주 높은 빌딩은 그다지 많지 않다.
도심 한쪽에 폭이 좁은 강이 보인다. 안데스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이라고 하나 한강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다. 외부인 눈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지역이지만 이 도시에도 강을 경계로 빈부가 나뉘고 여전히 특권층들이 사는 지역과 그들만의 전용 시설이 잔존한다. 최근에는 해발고도 1000미터 이상되는 산중턱의 지역에 새롭게 부촌이 형성되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스모그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 강북 산아래는 지반이 불안정하여 단층건물만 허용되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함께 겪고 극복해야 할 자연재해나 환경오염문제조차도 빈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니 이 또한 자본주의가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