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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광의 흔적, 발파라이소

by 장성순

칠레 해안도시 발파라이소 / 3월 7일 금요일

발파라이소는 한때 태평양 연안의 도시 중 가장 잘 나가는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19C에는 마젤란 해협을 돌아온 배들이 대부분 이곳을 거쳐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이후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은 식민지 풍의 건물이 가끔 보이는 그저 그런 도시다. 시내는 썰렁하고 칙칙한 색깔이며 인도는 좁은 데다 노점상들이 많아 제 방향으로 걷기조차 어렵다. 곳곳에 지저분하고 눈에 거슬리는 구조물이나 쓰레기도 많다.



IMG_6698-2.jpg 발파라이소의 노점상들



시내는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푸니쿨라를 타러 갔다. 벽화마을을 보기 위해서다. 푸니쿨라를 잠시 타고 올라가면 동네 분위기가 달라진다.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도 멋지고 독특한 양식의 대저택이 눈길을 끈다. 내려다보는 아랫동네와는 달리 이곳 산중턱에는 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의 저택은 규모도 크고 고풍스러우며 넓은 정원은 잘 손질되어 제철의 꽃들이 만개해 있다. 그중 하나는 발파라이소 최대 부호의 집이었다고 소개한다. 규모도 크고 외부 장식도 화려한 독특한 양식이다. 아일랜드에서 온 이민자의 집이라 아일랜드 풍으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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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턱에 위치한 저택들




건너다 보이는 맞은편 산동네도 서민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서 있다. 그중 한 건물에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현지 한국인에게 물어보니 철거반대 시위 내용을 담고 있는 플래카드라고 한다. 나중에 번역기를 돌렸더니 '우리는 놓아줘야 할까?'라는 번역문이 나온다. 이런 완곡한 형식의 시위문은 처음 보는 지라 번역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IMG_6724-2.jpg '우리는 놓아줘야 할까?'


저택들 앞에는 테라스 같은 넓은 공간이 있어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발파라이소 항구는 한때 융성하던 항구답게 깊숙한 만을 이루어 많은 배들이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수많은 집들이 항구 가까이 뿐만 아니라 주변 산등성이까지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 한때 이곳의 경제활동 규모가 짐작이 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과거 영광의 잔재가 남은 부촌과 쇠퇴의 길을 걸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몰락한 모습이다. 항구의 기능이 침체되면서 주민들의 생계를 위해 노점상을 많이 허용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시내가 더욱 산만해 보였나 보다.


IMG_6730.JPG 저택들 앞에는 테라스 형태의 전망대가 있다. 야외활동을 나온듯한 여학생들의 모습



IMG_6713.JPG 산중턱에서 내려다본 발파라이소 항구


전망대 난간에 서서 항구의 평온한 물빛을 본다. 두어 척의 배가 느릿한 속도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분주할 것 없고 정박한 배도 별로 없는 한가로운 항구의 모습이다. 한때는 수십 수백 척의 배들이 바쁘게 스치듯 드나들었으리라.

이런저런 항구의 옛 모습을 상상하며 바다를 바라보다 돌아보니 일행들이 사라져 버렸다. 주변을 둘러봐도 일행의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갔다면 저 아래에서 사라진 한 명을 찾느라 당황하고 있을 일행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일행이 내려갔는지를 먼저 확인해야겠다 싶어 왔던 길을 되돌아서 푸니쿨라 내렸던 곳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있는 기념품점으로 들어가 한국인들이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갔느냐고 물었다. 직원 2명이 얘기를 나누더니 여유롭게 웃으며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 보라고 한다. 미심쩍은 마음에 다시 한번 물어보니 한국인들은 내려가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벽화마을을 보러 올라왔다는 게 떠오른다. 직원들의 태도로 볼 때 그들은 일반적인 관광 코스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여유 있는 태도가 나를 안심시켰다.

일행에게 전화를 하며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가 드디어 일행들과 재회했다. 나의 조바심과는 달리 그들은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동네 구경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이라는 기특한 물건에 감사하며 나는 다시 평범한 관광객 모드를 장착하고 벽화를 감상하며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발파라이소 벽화마을

벽화는 크고 작은 골목마다, 그리고 계단에도 그려져 있다. 온 동네에 벽화를 그려 넣었는데 벽화가 없는 벽에도 주변 벽화와 어울리는 색으로 단장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벽화들이 많다. 건물의 특징이나 위치를 잘 활용해서 그린 재치 있는 벽화들도 곳곳에 보인다. 문 열린 가게들을 슬쩍 들여다보면 카페건 상점이건 내부장식도 개성이 넘친다. 과연 한때 잘 나가던 도시답게, 축적된 문화는 어떤 형태로건 드러나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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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754-2.jpg 벽화마을의 벽화들
IMG_6749 -2.jpg 벽화 마을 골목에서 노래하는 남미 청년


벽화를 보며 걸어 내려오니 처음 출발한 시가지가 나타난다.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갔다가 산등성이 벽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벽화를 감상하면서 시내까지 걸어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인 것이라는 것을 내려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조바심 칠 필요조차 없었던 거였다.


발파라이소의 해변

시내를 가로질러 가면서 예쁜 꽃시계도 보고, 해변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좀 기다리기는 했으나 음식이 나오는 순간 불평이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김이 솔솔 올라오는 검은색 뚝배기가 등장한 것이다. 조개가 듬뿍 들어간 해물탕인데 뜨끈한 국물까지 있어서 한국인 입맛에는 딱 좋다. 청양고추 몇 개만 넣으면 한국식 해물탕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아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니 동해 바닷가에 온 것 같다.

IMG_6757 -2.jpg 칠레식 해물탕을 먹은 식당


20250307_124624.jpg 칠레식 해물탕 빠일라 마리나



점심을 먹고 해변으로 내려갔다. 파도가 심하게 치는데 젊은 애들 서너 명이 파도 속으로 뛰어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가족들과 같이 나온 강아지는 주인이 던져주는 공을 쫓으며 행복하게 달린다. 모래사장은 바다와 만나는 경계면에서 급격히 낮아지는 것이 우리나라 동해와 비슷하다. 물빛도 동해처럼 청명한 푸른빛이다. 생각해 보면 같은 태평양이니 지금 여기서 파도치는 저 물결이 언젠가는 동해바다에서도 철썩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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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850-2.jpg 발파라이소 해변의 모습


슬픈 모아이 석상

발파라이소 근처 폰크 박물관 앞에는 모아이 석상이 서있다. 현대식 건물과 도로와 자동차들 사이에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거대한 석상은 본연의 신비함을 잃어버린 채 떠나온 이스터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스터 섬이 칠레에 소속되어 있음을 입증하려는 듯, 칠레 정부는 석상을 돌려달라는 이스터 섬 주민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엉뚱한 이곳에 석상을 세워놓았다. 인간들의 하찮은 갈등에 수백 년의 연륜을 지닌 이 석상은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IMG_6894 -2.jpg 폰크 박물관 앞의 모아이 석상



베라몬테 와이너리

와인은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관용적 표현이 '포도주에 물을 타서 내었다'이다. 옛날 와인이 더 독했는지 더 귀했는지 모르겠지만, 막걸리도 진한 원액을 만든 후 물로 희석해 먹는 걸 보면 비슷한 원리인가 싶다.

유럽은 지중해성 기후지역이 넓게 형성되어 포도 생산이 활발했으니 포도를 원료로 한 와인은 역사도 길고 생산도 많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함께 와인 또한 유럽인들의 문화적 동질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남미에 정착한 스페인 인들은 비슷한 기후가 나타나는 칠레 중부지방에 포도를 심고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칠레는 세계적인 와인 생산국이 되었다.


베라몬테 와이너리에 도착하면 투명한 공기와 높고 푸른 하늘, 강한 햇살이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다. 천장이 높고 서늘한 로비를 거쳐 건물 뒤편 발코니로 나가면 저 멀리 안데스 산맥이 보인다. 와이너리 주변에는 와인을 만드는데 필요한 포도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보통의 포도보다 알이 작은데 생각보다 달다.

시원한 그늘에서 와이너리 직원의 설명을 들었다. 포도를 기르고 수확하고 발효시키고 오크통에 저장하는 와인의 생산과정, 와인종류, 분류 방법들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와인을 시음하러 간다.

나는 불면증으로 인해 와인과 친분을 쌓으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와이너리 투어에서는 나에게 맞는 와인 하나쯤 알아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시시콜콜한 설명과 시음회의 과정을 거쳤지만 내게 맞는 와인을 정하지는 못했다.

와이너리 앞 과수원에서 포도 구경도 하고 맛도 보았다. 한 송이씩 가져갈 수 있다고 해서 제일 예쁜 송이를 챙겼는데 달콤한 과즙이 갈증을 해소시켜 줘서 오늘 와이너리 투어의 가장 의미 있는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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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몬테 와이너리 입구



IMG_6926 -2.jpg 포도 저장 탱크



IMG_6938-2.jpg 1층 로비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전시되어 있다


IMG_6943.JPG 건물 뒤편 발코니. 창문에는 안데스 산맥과 푸른 하늘이 비췬다.
IMG_6948.JPG 와인 시음회



IMG_6951-2.jpg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는 알이 작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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