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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풍경, 푸에르토 나탈레스

by 장성순

칠레의 남쪽, 푸에르토 나탈레스 / 3월 8일 토요일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푸에르토 나탈레스, 구름바다 사이로 설산이 보인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공항은 규모가 크지 않다. 수화물 찾는 컨베어벨트도 하나뿐이라 금세 짐을 찾았다. 버스로 잠시 달려 도착한 호텔 마틴 구신데. 아담하고 오래된 호텔이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캐리어를 2층으로 올리느라 낑낑대며 고생을 했으나 윤기 나는 나무계단과 실내가 포근한 느낌을 주니 기분이 좋다.


점심식사 후 골목 구경을 하며 근처 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강하지만 바람은 서늘하다. 우리나라 가을 날씨와 참 닮았. 거리는 지나치게 호젓하다. 모두들 들일을 나가고 텅 비어 버린 시골 마을 골목을 걷는 것처럼 사방이 너무 조용하. 도, 가게도 인기척조차 없으니 정지된 공간에서 나 혼자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다.


거리는 한적하고 깔끔하다


박물관은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 있는 좁고 긴 방에는 이 지역 자연사와 원주민 역사를 전시한다. 특이한 모양의 동물 발견. 지금은 멸종한 동물이며 토종 말이라고 한다. 대륙의 끝자락에 있어서 알려지지 않은 동물인가 본데 상상의 동물을 그려놓은 것 같다.


소박한 박물관의 모습



왼쪽의 이상한 동물은 멸종된 토종 말이라 한다.


이 방에는 원주민들의 역사도 전시되어 있다. 이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 부족들 사진을 보면 전형적인 인디언 모습이다. 케이프를 두르고 끈을 이마에 둘러 검은 머리를 고정시켰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문양들은 잉카지역에 비해 덜 화려하지만 반복되는 기하학적인 패턴이 아름답다.

전시물 중 내 관심을 끈 것은 긴 줄에 묶인 세 개의 공이다. 스페인인들이 잉카제국과의 싸움을 묘사한 기록에는 '이것은 세 개의 둥근 돌을 가죽주머니에 넣은 다음 1m 정도 되는 막대기에 묶어서 만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말에게 던져 다리를 묶었고 때로는 말에 탄 사람에게 던져 팔을 몸에 묶었다. 원주민들은 너무나 능숙하게 이 무기를 사용해서 도시 외곽에 있는 사슴을 잡을 수도 있었다'라고 되어있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 무기를 이곳에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실제는 막대기가 아니라 긴 줄에 달려있었다.

스페인인들이 '볼라'라고 부른 이 무기를 보니, 이곳 원주민들은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하한 인디언들로 잉카인과 혈연적 연관성이 있으며, '볼라'는 무척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무기임을 알겠다.


케이프를 두른 원주민(테우엘체)들, 이곳 주민들의 얼굴 모습.


원주민들이 사용한 문양과 그 문양을 넣은 담요, 맨 오른쪽은 스페인인들이 '볼라'라고 부른 원주민들의 무기.



내 관심을 끈 또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아이를 보호하듯 보듬고 있는 한 여인과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사진이다. 아이는 호기심과 경계의 눈으로 사진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은 1881년 프랑스 동물원에 전시된 원주민 모녀를 찍은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 인간의 잔인함과 야만성을 드러내는 사진이다. 이 대륙의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침략당하는 자들을 비하하고 야만화 했다. 이들을 동물원에 전시하며, 자신들이 이들의 삶을 문명화시키고 개선한다고 주장했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저 빼앗고 차지하려는 탐욕을 정당화하려는 반인륜적 행위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대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모녀는 짐승처럼 사냥당하고 끌려와 동물원에 전시되어 제국주의적 침략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때 인류가 저지른 부끄러운 기록을 바라본다. 아이의 눈을 다시 보니 비난의 눈길인 듯도 하다. 우울한 이야기를 담은 그 방에도 늦은 저녁의 가을 햇살이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 왼쪽에는 이 지역 정복자들의 역사가 사진과 소품으로 촘촘히 전시되어 있다. 재봉틀이나 금전등록기, 타이프 라이터, 주전자 등을 비롯해 전화기, 전축, 수술도구 등 일상용품들이다.



이 지역 진출 당시 사용한 여러 기구들,



박물관을 나와 거리를 따라 올라가니 소도시의 번화가다. 작은 규모의 상가들과 식당, 카페들과 대형 마트도 보인다. 갑자기 사람들이 많아진다. 관광객들과 가족 단위로 외출 나온 사람들이 뒤섞여 거리가 북적거리지만 두어 블록만 가면 다시 한산해진다.

이 골목 저 골목 낯선 길을 돌아다니다 긴 벽에 그려진 벽화를 만났다. 그림에는 말을 다루는 원주민들이 그려져 있다. 방금 다녀온 박물관에서 본 바로는 '파타고니아에 말이 처음 들어온 것은 17세기 중반이었다....말과 소는 넓은 초원에서 번성하여 불과 수십 년 만에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특히 말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여 파타고니아의 광활한 영토 전역에 퍼져나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원주민들은 이 새로운 동물에 빨리 적응했고 스페인 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기병을 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벽화는 그 모습을 재현한 것 같다. 거리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던 이 땅의 주인들을 여기서 만나게 되었다.


좀 더 걸어 내려와 숙소로 향하는 길에 공원을 지나쳤다. 공원에는 심한 바람과 추위에도 불구하고 공놀이하는 십 대들, 아빠와 자전거 타러 나온 아이들, 햇볕을 받으며 모여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 그리고 연인들이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계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실감한다.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있는 공원의 모습


공원 주변에 있는 카페


숙소로 향하는 도로를 계속 따라 내려오다 보면 해변이다. 해안을 따라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물과 조형물들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이쪽 해안에 서서 저 멀리 건너편을 보면 구름을 머리에 인 설산이 있다. 그 옛날 저 설산과 함께 하던 사람들, 마푸체 족과 테우엘체족 등으로 불리던 파타고니아의 주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설산만이 의연히 그곳을 지키고 있다. 이곳 원주민들의 삶이 세월을 견디며 파타고니아의 한 자락에 숨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오늘 이 모습 또한 덧없이 지나갈 한순간의 장면일 뿐인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이 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생각했으나 그 삶을 파헤쳐보면 인간의 흥망성쇠가 잔인하고 서글프다. 찬바람이 몰아친다. 해가 뉘엿하게 저물어 가니 거센 바람이 더욱 차다. 설산과 바다 사진을 좀 찍고 쫓기듯 호텔로 돌아왔다.


해변에서 건너다본 설산의 모습


거리에서 만난 특이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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