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로이 트레킹
엘 칼라파테는 거대한 빙하호 아르헨티노 호수 옆에 있는 호젓한 마을이다. 가끔씩 몰려다니는 관광객들이 아니라면 훨씬 한적했을 것이다. 푸르른 호수 위로 해가 뜨고 지면서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하지만, 무덤덤히 하루가 흘러가는 그런 마을이다. 나는 그 일상의 하루 속에 서서 잔잔한 호수에 퍼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엘 칼라파테의 아침을 맞이했다.
피츠로이 트래킹을 위해 엘찰튼 마을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표지판에는 서울이 17,931km라고 표시되어 있다. 거의 지구 반바퀴 거리이니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에 와 있음을 알겠다.
그런데 일본의 도쿄가 서울보다 더 멀리 표시되었으니 이상하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이들은 태평양을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거리를 측정한 거다. 내 머릿속 세계지도가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있는 것처럼 이들의 머릿속에는 대서양과 그 건너편 유럽대륙이 중심이다. 그들에게 유럽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맞서 싸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뿌리가 있는 곳이며 문화적으로도 끈끈히 연결되어 있었다.
나 또한 착각이었던 게 여기가 남미의 서쪽임에도 서울을 가려면 태평양보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게 더 가깝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지구의 둘레가 약 4만 km이므로 서울은 대서양을, 도쿄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게 가까운 코스다. 설마 이 표지판의 수치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엘찰튼을 향해 가다 보면 멀리 피츠로이산이 보인다. 달력이나 엽서에서 볼만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른 하늘 흰구름 아래, 만년설을 품은 산이 날카로운 암석 봉우리를 우뚝 세우고 위엄 있는 자태로 서 있다.
잠시 후 트래킹을 하며 이 피츠로이 산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엘찰튼 도착, 피츠로이 트래킹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등산로 입구에 서있는 피츠로이 트래킹 입장료 표지판을 보니 내국인, 외국인과 지역주민 등 입장료의 차이가 크다. 입장료 면제대상자가 많아서 자세히 보니 말비나스 전쟁참전 용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비나스 전쟁은 말비나스제도(포클랜드 제도의 아르헨티나 명칭)의 영유권을 두고 발생한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영토 분쟁으로 일반적으로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다.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 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이 세계 각지에 진출하며 확보한 영토이며 남미의 남단을 돌아가는 항로의 주요 지점이자 남극 진출의 교두보이다. 이 제도를 두고 두나라는 3개월간의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결과는 영국의 완승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말비나스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는, 패배한 전쟁이지만 그들에게는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역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국민에 비해 관광객에게 세배나 되는 입장료를 받는 것보다 말비나스 참전용사 입장료 면제가 나에게는 더 놀라운 일이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 끝은 차니 걷기 좋은 날씨다. 등산로 초입에서 내려다보는 엘찰튼 마을은 거대한 바위 언덕에 안긴 채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고 있다.
트래킹 초반에는 오솔길을 걷는 것 같다. 주변에 키 큰 나무가 별로 없고 키 작은 관목들이 봉긋봉긋 귀여운 모양새로 땅을 덮고 있다. 멀리서 보기에는 몽실몽실한 덤불처럼 보이지만 다가가 보면 날카롭고 빳빳한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다. 이건 자세히 보지 않아야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나무들이다.
키 큰 나무가 없으니 사방이 탁 트여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는 좋다.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은 길을 20여분 정도 걷다 보면 웅장한 산맥이 눈앞에 턱 하니 나타난다. 동네 뒷산을 오른 것 같은데 설악산의 풍광을 마주한 기분이다. 산자락 아래에는 너른 계곡이 펼쳐지고 강물이 긴 곡선을 그리며 흐른다. 수량이 많지는 않으나 설산을 배경으로 한 멋진 풍경이다.
위로 올라 갈수록 키 큰 나무들이 많아지고 불그스름하게 단풍 든 잎사귀도 보인다. 조금만 걸어 올라가도 눈앞의 풍경은 점점 장대해진다. 만년설이 쌓인 높은 산들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서있다. 가볍게 올라왔으나 험준한 산에 오른듯한 경치를 만날 수 있으니 가성비 끝판왕이라 할만한 트래킹이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 바람이 심하게 분다. 코스 정상의 작은 숲을 지나 피츠로이 산이 보이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시야가 탁 트이며 맞은편에 '산이 있구나' 하는 순간, 나의 탄성을 자아낸 건 푸르른 호수였다. 초록 숲에 둘러싸여 잔물결을 일으키며 넘실거리는 큰 호수는 비라도 한바탕 오고 나면 넘쳐흐를 듯이 수량이 풍부하다. 지금까지 산정상에서 본 칼데라호에 비할바가 아니다. 이곳은 빙하호다.
잠시 피츠로이산은 잊혀지고 호수의 아름다움과 호수를 감싼 나무들이 단풍 들어가는 풍경에 잠시 말을 잊고 서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호수에 물결을 일으키고 희끗하게 나이 든 산은 오래도록 그러했듯이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점심식사는 한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고추장 맛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