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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세운 장벽, 페리토 모레노 빙하

by 장성순

얼음장벽 앞에서 / 3월 11일 화요일

엘 칼라파테에서 출발하여 페리토 모레노 빙하지역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나 빙하지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확연히 서늘하다. 선착장에는 크루즈선 몇 척이 손님을 기다린다. 긴 줄을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한산한 분위기다.

IMG_7505.JPG 크루즈선 선착장


크루즈선을 탔다. 심한 맞바람을 가르며 배는 호수를 가로질러 빙하의 거대한 장벽을 향해 달린다. 멀리 거대한 흰색 벽이 두 산사이의 계곡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배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빙벽은 거대해지면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우뚝 서있다. 압도적 높이와 삐죽삐죽한 꼭대기의 날카로움, 그리고 수직 균열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 나온다.

빙벽 앞에 선 배는 거리를 두고 빙벽을 따라 움직이는데 빙하의 골짜기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쏟아지듯 몰아친다. 선실 밖 갑판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면서도 빙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 멀리서 뿌연 안개인 듯 먼지인 듯한 것이 일어나 빙벽이 부서지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후 멀리서 소리가 울린다. 빙하가 쪼개지는 소리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거대생명체의 작은 움직임을 본 것처럼 사람들이 탄성을 낸다.

크루즈 선은 빙벽 앞을 한동안 맴돈다. 빙벽이 내뿜는 서늘한 기운과 세찬 바람에도 나는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유백색의 거대한 장벽을 떠나지 못한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웅장함 속에 스며드는 것 같아 오래도록 바라보게 된다. 장벽 주변을 흐르는 유빙조차 큰 집채만 하다.



IMG_7525.JPG 멀리서 본 빙하의 모습. 빙벽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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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559.JPG 멀리서 본 빙벽은 가지런한 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다양한 모습이다.


IMG_7576 복사.jpg 크루즈선에 걸린 아르헨티나 국기



전망대에서 본 빙하계곡

크루즈에서 내려 빙하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에서는 빙하를 내려다보며 전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데 빙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계곡의 안쪽을 꽉 채운 빙하는 단단하게 다져진 거대한 얼음덩어리인데, 계곡 입구로 내려올수록 삐죽삐죽한 빙하 봉우리가 형성되어 서로 어깨를 맞댄 듯 오밀조밀 모여 서서 좁은 협곡을 만들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산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만년설이 쌓이고 다져지며 계곡을 가득 채워 빙하덩어리가 되고 계곡 아래로 밀려내려 오면서 균열이 생기고 쪼개지며 삐죽삐죽해지고 유빙도 생기는 것 같다. 유빙은 얼음장벽을 세우고 난 뒤 미처 치우지 못한 잔해들처럼 빙벽 주위를 떠다닌다. 물결 따라 멀리 흘러간 유빙은 넓은 호수 위를 떠다니는 것이 마치 엄마 품을 떠나온 아이처럼 외로워 보인다.


IMG_7529.JPG 유빙. 가까이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크기다.



거대한 빙하의 계곡 위에는 그만큼 거대한 구름덩어리가 떠있어 빙하계곡을 감싸고 있으니 드라이아이스로 하늘 장벽을 세워 빙하 뒤쪽 미지의 세계를 보호하려는듯하다. 구름 속에 어렴풋이 설산이 보인다.

푸르른 가을하늘만큼이나 호수의 물빛도 곱다. 빙하의 연녹색이 그대로 녹아내린 듯 에메랄드빛이다. 주변의 나무들은 단풍이 들기 시작하여 붉은색을 더하니 희고, 푸르고, 붉은색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한다. 하늘과 산과 호수가 셀 수없이 많은 날들을 함께하며 그려 왔을 풍경화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IMG_7612.JPG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빙하와 계곡 위의 구름더미
IMG_7630.JPG 균열이 간 삐죽삐죽한 빙하 모습, 떨어져 나온 빙하덩어리가 주변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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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635-2.jpg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호수가 멋진 조화를 이룬다.



오후 늦게 비행기를 탔고 저녁 무렵 우수아이아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바다에 면한 허허벌판 위에 있다.

어둠이 내리는 공항에서, 고단한 여행객의 발걸음은 느리고 낯선 기다림의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임을 바라본다.

어두워져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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