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글해협
남미대륙의 남쪽 끝으로 내려와 우수아이아에 안착했다. 남극대륙이 멀지 않은 곳이라 바람 끝이 차다. 왠지 공기도 더 맑게 느껴진다. 숙소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높은 곳에 있어서 해협이 내려다 보인다. 아침에는 기대치 않은 일출 감상도 했다.
우수아이아 시내에 면한 비글해협은 꽤 널찍한 내해를 갖고 있다. 해협의 폭이 넓어 좌우의 산들이 멀리 보인다. 우수아이아에서 출발한 유람선은 해협 양쪽의 낮은 산 너머 만년설이 희끗한 높은 봉우리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나아간다.
유람선을 타고 나가면 내해에 몇 개의 섬이 있는데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인공 구조물이 거의 없고 자연 상태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바다생물들이 많이 서식한다. 사람들은 굳이 가마우지섬이니 바다사자 섬이니 이름을 붙여 놓았지만 저들에게는 경계가 없다. 작은 체구에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가마우지들과 투실투실 살이 오른 바다사자들이 사이좋게 어울려 살아간다. 주로 평평하고 낮은 곳에는 가마우지가 많고 절벽 모양의 층이 진 곳은 바다사자들의 자리다.
가마우지들은 지나가는 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에 분주하다. 물 위를 종종거리고, 낮게 날아올라 바닷속 물고기를 날렵하게 채어가고, 어느 한 귀퉁이에서는 한 쌍이 부리를 마주대고 사랑을 속삭인다. 유람선에서 먹이를 주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인지 새들은 배 주위로 몰려들지 않는다. 인간과 야생의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의 생활에 간섭이 없다. 가마우지는 작은 펭귄처럼 보인다.
바다사자는 층을 이룬 바위 절벽에 주로 모여 있다. 이 추운 날씨에도 첨벙거리며 바다에 뛰어들고 갯바위에 드러누워 하품을 하고 몸을 뒤척이는 모습이 한가롭다. 유람선은 바다사자섬 근처를 배회하며 그들의 유유자적한 일상을 지켜본다. 유연한 비만 물고기 같은 바다사자는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미끄러지듯 들어가는데 덩치에 비해 물보라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속에서 나올 때는 번들거리는 육중한 몸을 날렵하게 바위 위로 끌어올리는 모습이 신통하다. 저희들끼리 소리 내어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지만 주로 바위 위에 길게 누워 해바라기를 한다.
유람선은 바다사자들 주변을 한동안 머뭇대다 슬며시 자리를 뜬다. 유람선도, 타고 있는 관광객들도 저들의 경계선을 지켜주며 조심하니 기특한 일이다. 어쩌면 극지에 가까운 지역들이야말로 인간들이 철들고 나서 개발한 곳이라 온전히 자연의 모습을 지켜줄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싶다. 16세기에 원주민을 짐승처럼 사냥했던 이들의 후손이, 현대에 이르러 가마우지와 바다사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니 인류의 정신적 진보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평화로운 인류의 미래를 꿈꿔본다.
가마우지 섬과 바다사자섬을 지나 좀 더 나아가면 '세상 끝 빨간 등대'가 보인다. 세상 끝이라는 말에 난바다 경계선 즈음에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내해에 자리 잡고 있다. 외롭게 홀로 떠 있을 거라는 나의 생각도 착각이었다. 섬에는 바다사자와 가마우지들이 무리 지어 등대를 지키고 있다. 두 무리는 마치 서로의 묵계를 알고 있다는 듯 좌우로 영역을 나누어 자리 잡았다. 일부 공유하는 공간에서도 별 마찰 없이 섞여있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등대는 낡고 헐었으나 빨간 색상만은 선명하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영역을 차지했음을 소리쳐 말하는 듯하다.
비글해협 투어 후 점심식사. 오후에는 자유시간이라 우수아이아 시내에 있는 박물관을 갔다. '세상의 끝 박물관'이 가까이 있어 찾았는데 내가 아는 일반적인 박물관의 출입구 없어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한쪽 귀퉁이에 시커먼 옆문이 있어서 열어보았으나 잘 열리지도 않는다. 몇 번 밀고 당기고 하는데 안에서 문을 열어준다. 박물관이 맞냐고 물으니 웃으며 들어오라고 한다. 이 박물관은 숨어 있기로 작정을 하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만 방문을 허용하는 곳인가 보다 하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원주민들의 생활이 궁금해서 찾았으나 이곳 또한 대부분이 정복자의 역사다. 초라한 몇 장의 사진과 그림들로 이 땅의 주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대부분의 전시물은 도래한 유럽인의 정복과정에 대한 역사다. 이곳의 각 지역에 처음 발 디딘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지도나 타고 온 배 등이 전시되고 침략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정착초기의 생활이 설명되어 있다.
전시실의 규모가 너무 작아 아쉬운 마음에 떠나지를 못하고 다시 한번 신중히 돌아보다가 전시물 중 아르헨티나 국기 가운데 있는 사람 얼굴모양의 태양을 발견하고 혼자 뿌듯해했다.
텅 빈 박물관을 혼자 전세 내듯 여유롭게 꼼꼼히 보았으나 너무도 초라한 규모라 더 이상 볼 게 없다. 유일한 관람객인 나의 동선을 따라 관리인의 눈동자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박물관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탈출을 감행했다. 나가는 출구가 있나 신중히 살펴보았으나 문이 보이지 않아 들어온 입구로 나가려는데 관리인이 표를 보여달라고 한다.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표를 내미니 손가락으로 표를 가리키며 이 티켓으로 또 하나의 박물관을 더 방문할 수 있다고 한다.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니 시간도 넉넉하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첫 박물관에서 구입한 티켓으로 두 박물관 모두 관람하는 게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거리도 가깝고 무엇보다 입장료를 내기에는 첫 번째 박물관의 규모가 너무 단출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박물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지사 관저 시절 사용되었던 회의실이 재현되어 있고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실망스럽던 내 기분을 전환시켜 준 건 나무로 만든 세탁기였다. 나무 원통을 손잡이로 돌려 세탁하는 방식인데 반원모양의 덮개를 닫고 회전시키면 요즘 사용하는 드럼 세탁기와 거의 같은 원리인셈이다. 이로써 초기의 세탁기가 드럼세탁기 형태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드럼세탁기의 원조를 본 셈이라 박물관에서 본 것들 중에 제일 신기하고 재미있는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