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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달리다(2)

알티플라노 고원

by 장성순

고원에서 만난 설경 / 3월 5일 수요일

어두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지프차에 올랐다. 마을을 빠져나와 또다시 광야를 달린다. 부슬거리며 비가 오니 사방은 온통 희뿌옇다. 안개비 속의 흐릿한 대자연은 옛 전설의 배경이 될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다. 들판을 가로질러 난 거친 길만이 인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래된 흙길에는 구덩이가 깊이 패여 차가 덜컹거리고 물이 고여 진창인 곳도 있다.

멀리 설산이 보인다. 차를 달리니 설산은 다가올 듯하면서도 여전히 저 멀리 서있다. 완만한 고개가 나타나 올라가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고개를 넘자마자 다들 탄성을 지른다. 하얀 눈밭이 펼쳐져 있다.

잠시 차에서 내려 예정에 없던 눈구경을 한다. 포토타임이다. 현지인 기사들도 이 계절에 이런 눈은 낯선 광경이란다.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함박웃음이다. 어디선가 비쿠냐 두 마리가 나타나 눈밭을 가로질러 뛰어간다. 늘 멀리서만 바라보던 설산 속에 내가 문득 들어와 선 것 같다.

IMG_6405-2.jpg 갑자기 펼쳐진 설경



IMG_6413-2.jpg 차가 다니는 길은 녹아 질척거린다.

설경을 보고 난 후에도 한동안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다. 하늘은 희끄무레한 보자기를 덮은 것처럼 온통 회색으로 가득 찼다. 온하늘이 한 가지 색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 또한 장관이다. 지평선에 보이는 산들은 회색 보자기의 끝자락이 닿을 듯 말듯하게 내려와 흔들리는 안개 커튼 뒤에서 흐릿한 형체를 보여준다. 하늘과 땅의 경계는 한 뼘도 안될 것 같다.


차가 달리는 동안 날씨는 흐렸다 개였다 한다. 혹은 우리가 서로 다른 날씨 속을 통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울하고 차분한 회색 구름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운 듯하더니 주변 풍경이 점차 선명해지고 어느 순간 하얗고 몽실몽실한 구름이 파란 하늘 위에 떠있다.

하늘이 넓어서인지 순간순간 역동적으로 변하는 구름은 가히 장관이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풍경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알티플라노 고원은 매 순간 새로움으로 시간과 공간을 채우는 자연의 교향곡을 가장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다.


IMG_6423-2.jpg 하늘을 가득 채운 회색 구름이 산마루까지 내려와 앉았다



홍학 전망대

홍학 전망대의 주인공은 홍학이 아니라 위쪽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다. 인간의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풍경. 한두 개의 색깔로 농담을 조절해 그린 담채화 같은 색조와 가로로 길게 뻗은 선들은 눈에 걸림이 없으니 이 차분하고 웅장한 광경에 나는 잠시 생각을 쉬고 망연히 서서 풍경에 취한다. 고원을 달려온 거센 바람이 나를 흔든다.

전망대에서 내려가 호숫가를 걷는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홍학이 얼마나 많은지 눈에 들어온다. 끼룩거리는 홍학의 울음소리는 정적인 자연에 동적인 생기를 불어넣는다.


IMG_6462.JPG 전망대 가는 길
IMG_6450-2.jpg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홍학 호수
IMG_6486-2.jpg 홍학 호수의 주인공은 홍학이 아니라 아름다운 배경이다.


천연온천

알티플라노 고원이 온통 화산지형이다. 에두아르도 아바로바 국립보호구역 내에는 간헐천이나 온천뿐만 아니라 곧 용암이 터질 듯 땅속에서 연기가 나는 곳도 있다. 살아있는 지구의 숨결을 잠시 느낀 후 천연 온천을 하러 갔다.



IMG_6513.JPG 화산 연기가 나는 구덩이들


온천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탈의실과 샤워실이 갖추어져 있다. 따듯한 온천에 발을 담그니 얼굴을 스치는 찬바람에 기분이 상쾌하다. 느긋이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거대한 화폭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 같다.

온기와 풍경에 취해 행복하게 앉아 있는데 누군가 옆에 다가와 귀에 익은 한국어로 말을 건다. 혼자 여행 다니는 한국 아줌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자기 여행담을 쏟아낸다. 한국말이 그리웠나 보다.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앉아 얘기를 시작할 작정으로 보여 건성 대답하며 얼른 정리하고 족욕을 마쳤다. 나의 속 좁은 행동이 찔리기는 했으나 좀 더 있으면 "도를 믿으십니까?"라는 말까지 나올 듯한 분위기라 어쩔 수 없었다.


IMG_6518-2.jpg 천연 온천의 규모는 아담하나, 바라보는 풍경은 장대하다.


IMG_6534-2.jpg 황량한 들판, 흐르는 듯한 선을 가진 산,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이 이 고원의 특징이다


IMG_6550-2.jpg 알티플라노 고원에서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원시 그대로의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알티플라노 고원을 차로 달리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장대하고 황량한 풍경은 가슴 깊숙한 곳의 감동을 끌어낸다. 불그스름한 산맥은 나무 한그루 없이 벌거벗은 채 창조주 비라코차가 막 빚어낸 듯한 모습으로 서 있고, 흐릿한 물빛 호수도 태초의 원시성을 품은 채 고요히 가라앉아있다. 아름답다는 찬탄도, 경이롭다는 탄성도 없지만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시작점에 서있는 지구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고, 가슴 울컥한 감동이 밀려온다.

고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한 번은 차가 고장 나서 길가에서 오래 기다리게 되었으나 걱정과 짜증보다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한다. 잠시 다녀가는 여행객에게는 봐도 봐도 싫증 나지 않는 풍경이 있어서.


오늘은 칠레 국경을 넘었다. 허허벌판에 입국수속하는 건물과 세관청 건물 두 개만 덜렁 서 있다. 여행용 캐리어를 컨베이어 벨트에 싣고 내리는 절차를 거친 후 무사히 입국 완료.


IMG_6551.JPG 창고처럼 생긴 국경 세관청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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