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특별한 주문
첫 주가 지나고 월요일 아침. 민희는 이제 어느 정도 적응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출근했다.
거주인들의 얼굴도 익숙해졌고, 각자의 취향도 조금씩 파악했다. 오늘은 무난하게 김치찌개와 밥으로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정희 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민희 선생님, 오늘 좀 특별한 부탁이 있어요."
"무슨 일이세요?"
"영미 어머니가 오늘 면회 오시거든요. 그런데..."
정희 씨가 말을 흐렸다.
"영미가 어머니 오시는 날에는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해요."
"어떤 음식이요?"
"잡채요. 영미 어머니가 예전에 자주 해주셨대요."
민희는 잠시 당황했다. 잡채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야채도 여러 가지 써야 하고, 각각 따로 볶아야 하고, 당면도 삶아서 양념해야 하고.
"12인분을 만들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영미 것만 해주셔도 돼요."
"아니에요." 민희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분들은 다른 메뉴를 드시고 영미 씨만 잡채를 드시면 섭섭해하시지 않을까요?"
정희 씨가 민희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워요. 그럼... 도와드릴게요."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근, 양파, 시금치, 표고버섯, 파프리카. 야채를 하나하나 채 썰었다.
"잡채는 손이 많이 가지만, 한번 만들면 다들 좋아해요." 정희 씨가 말했다.
"자주 해주시나요?"
"아니요, 특별한 날에 만요. 생일이나 명절, 아니면 오늘처럼 가족이 오실 때."
민희는 야채를 볶으면서 생각했다. 영미는 당뇨가 있어서 평소에는 식단 조절을 철저히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이다.
"영미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해요." 정희 씨가 조용히 말했다.
"자주 오시나요?"
"한 달에 한 번 정도요. 어머니도 연세가 있으셔서 자주 오시기 힘드시거든요."
당면을 삶으면서 민희는 영미의 마음을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 어머니를 만나는 날. 그날만큼은 어린 시절 먹었던 그 맛을 다시 느끼고 싶을 것이다.
오전 10시쯤, 잡채가 완성됐다. 윤기 나는 당면에 형형색색의 야채가 어우러져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우와, 맛있겠다!"
어느새 나타난 민수가 감탄했다.
"민수야, 오늘 특별한 날이야. 영미 어머니 오시는 날."
"아, 영미 누나 엄마요? 저번에 봤는데 진짜 착하셨어요!"
민수가 잡채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먹을 수 있어요?"
"당연하지. 다 같이 먹을 거야."
민수가 환호성을 질렀다.
점심시간 전, 영미 어머니가 도착했다.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였는데,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들어오셨다.
"어머님, 어서 오세요." 정희 씨가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먼 길 왔네."
영미가 어머니를 보자마자 달려갔다. 그리고 꼭 안겼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물이 글썽거렸다.
"우리 딸, 보고 싶었지?"
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영미가 처음으로 감정을 이렇게 드러내는 것을 봤다.
"오늘 특별히 잡채를 준비했어요." 정희 씨가 영미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 잡채를? 우리 영미가 좋아하는 건데..."
"네, 영미가 어머니 오시는 날에는 잡채를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영미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아이가...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점심시간. 모든 거주인들이 모였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분위기도 다르게 느껴졌다.
영미가 어머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잡채를 한 젓가락 떠서 먹었다. 천천히 씹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 표정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맛있니?"
영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옛날에 엄마가 해준 맛이랑 비슷하니?"
영미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는 그 모습을 보며 뿌듯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 그것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 몰랐다.
다른 거주인들도 잡채를 맛있게 먹었다. 민수는 두 그릇이나 먹었고, 혜진은 "이거 진짜 맛있어요!"를 연발했다. 준호도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식사 후 영미는 어머니와 함께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말은 없었지만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정희 씨가 말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보람 있었어요."
"영미가 정말 행복해했어요. 선생님 덕분이에요."
민희는 창밖을 바라봤다. 영미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
"음식이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구나..."
"그럼요.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니에요. 추억이고, 사랑이고, 위로거든요."
오후에 영미 어머니가 돌아가실 시간이 됐다. 영미가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를 배웅하며 눈물을 흘렸다.
"영미야, 울지 마. 다음 달에 또 올게."
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 잡채 정말 맛있었어. 엄마가 해준 것처럼 맛있었지?"
영미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영미,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서 엄마는 마음이 놓여."
영미 어머니가 떠나고 난 후, 영미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민희가 다가갔다.
"영미 씨, 괜찮아요?"
영미가 민희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워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영미가 말을 한 것이었다.
"영미 씨..."
"오늘... 엄마 맛... 나왔어요."
민희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영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았다.
"다음에 어머니 오실 때도 잡채 해드릴게요."
영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저녁 시간. 분위기는 평소로 돌아왔지만 뭔가 달랐다. 영미가 민희에게 자주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직접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영미 씨도 설거지 도와주시려고요?"
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영미가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엄마... 요리... 잘해요."
"그래요? 어떤 음식을 잘하시는데요?"
"잡채... 김치찌개... 떡볶이..."
영미는 더듬더듬 말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엄마랑 같이 살았어요?"
"네... 오래... 같이 살았어요."
"보고 싶으시죠?"
영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도... 여기... 좋아요. 친구들... 있어서..."
민희는 영미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영미 씨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영미가 민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날 밤, 집으로 가는 길에 민희는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는 특별했다. 단순히 잡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영미와 어머니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음식은 정말 단순히 영양소가 아니었다. 사랑이고, 추억이고, 연결고리였다.
집에 도착해서 딸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엄마, 그분 정말 기뻤겠다."
"응, 정말 행복해 보였어."
"엄마도 행복해 보여."
민지의 말에 민희는 깜짝 놀랐다.
"그래?"
"응, 요즘 엄마 표정이 밝아졌어. 일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거려."
민희는 거울을 봤다. 정말 얼굴이 밝아진 것 같았다.
그날 밤 일기에 썼다.
'다섯째 날의 깨달음: 특별한 주문은 단순한 메뉴 요청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연과 그리움, 그리고 사랑이 담겨 있다. 오늘 나는 음식을 통해 모녀를 이어주는 행복을 느꼈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구나.'
민희는 감사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내일은 또 어떤 특별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