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메뉴

4장 알아가는 시간

by 윤슬

넷째 날. 민희는 일찍 도착해서 조용히 거주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제 준호의 일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들 각자에게는 말하지 않는 신호들이 있다는 것. 그 신호들을 읽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침 7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사람은 항상 똑같았다. 수정이었다. 40대 초반의 여성으로, 매일 정확히 7시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시계를 보는 것도 없이 정확한 시간이었다.

"수정 씨, 안녕하세요."

수정이 민희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늘 아침에는 뭘 드시고 싶어요?"

수정이 주방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냄비를 가리켰다.

"국이 드시고 싶으시군요."

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뉴스를 봤다. 항상 같은 자리, 항상 같은 시간이었다.

"수정 씨는 규칙적이에요." 정희 씨가 말했다. "15년 동안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어요."

"그럼 메뉴도 비슷한 걸 좋아하시나요?"

"네, 변화를 좋아하지 않으세요. 늘 비슷한 음식을 드시죠."

민희는 수정을 위해 된장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단순하고 친숙한 맛이었다.

7시 30분. 두 번째로 나타나는 사람은 혜진이었다. 20대 후반의 밝은 여성이었다.

수정과는 정반대로 매일 다른 시간에 일어났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혜진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혜진 씨. 잘 주무셨어요?"

"네! 오늘 꿈에서 떡볶이 먹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혜진은 늘 꿈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꿈에 나온 음식 이야기를 꼭 했다.

"떡볶이요? 그럼 매운 거 좋아하세요?"

"네! 저 매운 거 엄청 좋아해요! 근데 여기는 맵게 안 해주죠?"

정희 씨가 웃었다. "혜진이는 매운 걸 좋아하지만 위가 약해서 못 먹어요."

"아, 그렇구나."

"혜진아, 오늘은 계란찜 어때?"

"좋아요! 저 계란찜도 좋아해요!"

혜진은 뭐든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까다로웠다. 계란찜도 너무 뜨거우면 안 되고, 너무 짜면 안 되고, 파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안 됐다.

8시. 세 번째는 영미였다. 항상 조용히 나타나서 구석자리에 앉았다.

"영미 씨, 안녕하세요."

영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민희가 하는 요리를 조용히 지켜봤다.

"영미 씨는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정희 씨가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이 뭘 하는지 항상 지켜보죠."

민희는 영미의 시선을 느끼며 요리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괜찮았다. 영미가 지켜보는 것도 관심의 표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8시 30분. 네 번째는 준호였다. 어제의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왔다.

"준호 씨, 안녕하세요. 오늘은 냄새 안 나는 메뉴예요."

준호가 민희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깜짝 놀랐다. 준호가 말을 한 것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히 "고마워요"라고 했다.

"천만에요, 준호 씨."

준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한결 부드러웠다.

아침식사가 시작됐다. 민희는 각자의 식사하는 모습을 유심히 봤다.

수정은 항상 같은 순서로 먹었다. 밥 한 숟가락, 국 한 숟가락, 반찬 한 젓가락. 정확히 그 순서를 반복했다.

혜진은 모든 걸 섞어서 먹었다. 밥에 국을 부어서 비벼 먹었다. 정희 씨는 "혜진이만의 방식"이라고 했다.

영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오래 씹은 다음에야 삼켰다.

준호는 조용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각자 다 다르네요." 민희가 말했다.

"15년 동안 보니까 이제 누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먹는지 다 알아요." 정희 씨가 웃었다.

"그럼 저도 언젠가는..."

"물론이죠. 시간이 지나면 민희 선생님도 이분들을 다 알게 될 거예요."

점심 준비 시간. 오늘 메뉴는 미역국과 불고기였다. 민희는 각자의 취향을 생각하며 조리했다.

수정을 위해서는 미역국을 진하지 않게 끓였다. 수정은 진한 맛을 싫어했다.

혜진을 위해서는 불고기를 조금 달게 만들었다. 매운 건 못 먹지만 단 건 좋아했다.

영미를 위해서는 당뇨를 고려해서 설탕 대신 올리고당을 넣었다.

준호를 위해서는... 냄새가 강하지 않도록 양파를 많이 넣지 않았다.

"와, 선생님 벌써 다들 기호를 파악하셨네요." 정희 씨가 감탄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제오늘 본 걸로 추측해 본 거예요."

점심시간. 거주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민수도 컨디션이 좋아져서 나왔다.

"선생님! 오늘 뭐 해주셨어요?" 민수가 밝게 물었다.

"미역국이랑 불고기예요."

"와! 불고기! 저 불고기 좋아해요!"

민수가 첫 숟가락을 떴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맛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식사를 시작했다. 수정은 여전히 자신만의 순서를 지켰다. 혜진은 역시 모든 걸 섞어 먹었다. 영미는 천천히, 준호는 조용히.

그런데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 진우라는 30대 남성이 계속 불고기만 먹고 있었다.

"진우 씨, 미역국도 드세요."

하지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불고기만 계속 먹었다.

"진우는 한 번에 한 가지만 먹어요." 정희 씨가 설명했다.

"먼저 불고기를 다 먹고, 그다음에 밥을 먹고, 마지막에 국을 먹어요."

"아, 그런 거였군요."

"처음엔 편식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진우만의 순서가 있는 거였어요."

민희는 또 하나 배웠다. 겉으로 보기엔 이상해 보이는 행동도 그 사람만의 이유가 있다는 것.

식사 후 설거지를 하는데, 혜진이 다가왔다.

"선생님, 저도 도와드릴까요?"

"혜진 씨도 설거지 도와주세요?"

"네! 저 그릇 닦는 거 좋아해요!"

혜진은 민수와 달리 말을 많이 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계속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어디 살아요?"

"집에서 여기까지 20분 정도 걸려요."

"와, 가까워요! 저희 집은 멀어요. 엄마가 한 달에 한 번 와요."

"보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어요. 근데 여기도 좋아요. 친구들이 있어서요."

혜진은 이곳을 집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거주인들을 가족처럼 여겼다.

"수정 언니는 조용하지만 착해요. 제가 아플 때 옆에 있어줬어요."

"영미 언니는 말은 안 하지만 눈빛이 따뜻해요."

"준호 오빠는... 음, 어려워요. 근데 가끔 웃을 때가 있어요."

혜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민희는 이들의 관계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15년 동안 함께 살면서 만들어진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다.


오후에는 간식 시간이 있었다. 민희는 처음으로 간식 준비를 맡았다.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간단한 거요. 과일이나 빵 같은 거."

민희는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12명분의 사과를 일정한 크기로 썰었다.

그런데 사과를 나눠주면서 또 다른 특성을 발견했다.

수정은 사과 껍질을 꼭 벗겨서 줘야 했다. 껍질이 있으면 먹지 않았다.

혜진은 작게 썰어서 줘야 했다. 큰 조각은 먹기 어려워했다.

영미는 당뇨 때문에 조금만 줘야 했다.

준호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배를 더 좋아했다.

"모든 게 다 달라요." 민희가 중얼거렸다.

"그게 사람이에요." 정희 씨가 말했다. "똑같은 사람은 없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장애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은 각자의 개성과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저녁 시간. 오늘은 특별히 생일인 거주인이 있었다. 정수라는 20대 청년이었다.

"생일상을 차려드려야 하나요?"

"여기서는 생일 때 간단하게 해요. 미역국하고 케이크 정도로요."

민희는 정수를 위해 특별히 미역국을 끓였다. 그리고 작은 케이크도 준비했다.

"정수야, 생일 축하해!"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정수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케이크 촛불을 끄면서 소원을 빌었다.

"뭐 빌었어?" 혜진이 물었다.

"비밀이에요!" 정수가 웃었다.

그 순간 민희는 따뜻함을 느꼈다. 이들은 정말 가족 같았다.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함께 축하하고, 기쁨을 나눴다.

하루를 마치며 민희는 오늘 배운 것들을 정리했다.

수정의 규칙적인 생활, 혜진의 밝은 성격, 영미의 조용한 관심, 준호의 서툰 감사 표현, 진우의 독특한 식사 순서, 그리고 정수의 순수한 기쁨.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각자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알아갈수록 이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민희는 생각했다. 병원에서 일할 때는 환자들을 '당뇨환자', '고혈압환자'로 분류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수정 씨', '혜진 씨', '영미 씨'였다. 각자의 이름과 개성을 가진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날 밤 일기에 썼다.

'넷째 날의 깨달음: 사람을 아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간만큼 소중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오늘 나는 12명의 개성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발견이 있을까?'

민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잠들었다. 내일도 이들과 함께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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