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

by 규린종희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늘 그 자리에 있다 해도 한번 뒤돌아서 확인해보고 싶을 때...


어린 날 한밤중이면 꼭 변이 마려웠습니다. 그것도 겨울밤에 말이지요. 소변이야 윗목이나 마루에 둔 요강을 사용하면 되었지만 대변은 어디 그런가요. 한두 번 그러던 것이 습성이 되어 자주 그런 일이 있고 보니 한밤 행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절 시골 화장실이야 뻔하지요. 처가와 뒷간은 멀리 있어야 한다는 옛말처럼 뒤란을 돌아 안채와 떨어진 곳에 있으니 어린 내게 한밤중 일어나는 변의는 식구들에게는 매우 귀찮은 일이었지요. 왜냐고요? 무섬증이 많은 나는 엄마 아버지가 밖에서 지켜줘야 일을 보니까요. 오빠들은 도회지로 유학 가 있었고 언니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 바빴으니 엄마, 아버지 어느 때는 할아버지가 뒷간 행차에 호위무사가 되었습니다.


뒷간과 관련된 무서운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가요. 하필이면 그런 때 꼭 무서운 이야기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건 또 무슨 조화인지. 그러니 오들오들 떨면서, 때로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온몸을 움찔거리며 겨우 일을 끝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호위무사들이 처음 그 자리에 있는지 애타게 불렀지요. 엄마.... 아버지... 할배요.... 내 소리에 용수철 튀듯 오냐, 그래 , 여기 있다는 답이 오지 않는 날이면 팔려가는 소처럼 얼마나 애절하게 소리를 질렀는지 모릅니다


눈물범벅이 되어 나오면 늘 그 자리에 호위무사들이 있었습니다. 할배는 장죽을 한껏 빨아들여 홀쭉한 얼굴로, 아버지는 뒷짐진채 빙긋 웃으며, 엄마는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하얗게 질린 나를 놀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뒷간이 아닌 닭장 옆에서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헛간 옆에 붙어있는 닭장은 할배 사랑방에서도 아버지 방에서도 엄마 방에서도 문 열면 보이는 곳이니까요.


닭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겨울밤 상상이 가는가요. 사위는 어두워 금방이라도 별이 뚝뚝 떨어질 듯한 한밤입니다. 닭들은 고고곡 고고곡 가느다란 소리를 흘리며 잠들어있고, 횟대에 앉은 수탉이 가끔 다리를 뒤로 죽 뻗으며 날개를 푸드덕 펼치기도 했습니다. 마당을 쓸어가는 바람에 삭정이가 툭 떨어지기도 하고 마당가에 놓아둔 물건들이 덜컹이며 굴러다니기도 했습니다.


머리 위로 은하수가 흐르고, 별들이 눈빛처럼 반짝이던 밤입니다. 아니 별빛이 바람에 흩날리던 꽃잎처럼 쏟아지는 밤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어쩌다 눈발이라도 날리는 날이면 쪼그려 앉은 채로 눈을 맞기도 했고, 발목까지 눈이 쌓인 날이면 그 자리만큼 밀쳐내어 쪼그려 앉기도 했습니다. 마당이 아무리 넓어도, 눈 내린 밤이 아무리 포근해도 그만큼의 자리만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문을 열어두고 나를 지켜보는 어른들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 그림입니다. 그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세상 가장 따뜻한 빛이었습니다. 세 분의 방은 언제고 나를 지켜보는 든든한 배경이었습니다. 바람에 문이 닫힐까 싶어 쩌귀와 문틀사이에 신문지를 말아 괴여둔 아버지, 천조각을 뭉쳐 괸 엄마, 한 손으로 오래도록 문을 잡고 있었던 할배는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생사의 처지를 달리하기 전까지는.... 세월이 한참 지나도 그 순간의 거룩한 기억은 나를 더욱 세워줍니다.


늘 그 자리에 있어 있는지 없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 중심을 도추道樞라고 합니다. 문의 쩌귀처럼 반드시 있어야 세상의 이치가 돌아가는 근원의 자리라지요. ‘애써 돌아보지 말아요. 언제든 그 자리에 있으니 염려 말아요’. 그 말이 은하수처럼 내게 스며들던 날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닭장 옆에 쪼그려 앉아 보았던 방을 보는 듯했습니다. 아니 그 방에 가득 찬 불빛이 내게로 건너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보려고요. 쩌귀 같은 그런 사람...


언제든 그 자리에 있으니 염려 말아요 그대.

-그림. 설희 .<그런 사람>. 종이에 색연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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