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古墳), 죽음의 문화로 삶을 풀다

by 규린종희

칠월 한낮,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넌출거리는 햇살의 그림자를 봅니다. 그림자와 나 사이로 칠월 바닥은 객혈하듯 열기를 쏟아냅니다. 발바닥을 뜨겁게 달구는 것은 땅의 바닥에서 밀어 올리는 뜨거움 때문이겠지요. 저마다의 높이를 위해 저마다의 깊이를 드러내지 않을 뿐, 바닥의 뜨거움은 아마도 깊이의 꿈틀거림일 테지요.


농밀한 햇살을 밀어내며 걷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칠월의 고분, 죽음의 문화 위에 삶을 풀어봅니다. 부드러운 선으로 나눠진 고분의 능선과 허공의 경계가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결코 아님을 알기에 1500년 전 피장자를 상상하며 까슬한 잔디로 맨발을 옮겨봅니다. 삶의 완성이 죽음이라 했던가요. 과거의 죽음은 미래의 내 죽음이라는 생각의 끝에 닿을 때 그 순간 곁에 선 동행의 존재는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경매 물건이 있다는 지인의 짧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경매라는 말에 잎 떨군 마른나무를 보는 듯했습니다. 이리저리 바람에 팔랑거릴 이파리 하나 건사하지 못한 창백한 나무의 비쩍 마른입이 경매라는 이름으로 비틀거렸습니다. 파리하게 드러난 맨살 위로 집행영장 같은 붉은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을 나무를 생각하면 경매는 참으로 잔인한 언어입니다. 그래서인지 경매물건이 있다는 말에 나는 보트피플이 된 한 가정이 떠올랐습니다.


삶의 과정이야 저마다 다르지만 누구든 그만큼의 무게를 지고 살아갈 테지요. 그 대상이 무엇이었든 어깨에 눌어붙은 무게로 차라리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움직일수록 아니 몸부림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 때, 사람은 처지를 원망하게 됩니다. 원망은 비난을 낳고 비난은 비관을 낳으며 마침내 감정의 극단으로 매몰아갑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차라리 물처럼 흘러가도록 힘을 빼는 게 살아남는 길입니다. 흘러가는 일은 바닥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닥은 지난한 삶이 응집된 세계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바닥은 탄탄합니다. 바닥이란 위를 향한 계단이기 때문입니다. 바닥은 끄트머리가 아닙니다. 바닥은 가장자리가 없습니다. 가장자리가 없다는 것은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근원으로서의 바닥이니 당연 응축과 응집이 교직으로 결구되어 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삶이 무엇이냐 물어본다 해도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동사 아닐까요. 바닥을 만나는 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가능합니다. 그것은 수용입니다. 운명과 숙명사이 자아라는 끈을 놓지 않은 결과입니다. 대범하게, 호탕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로서 삶을 발견할 때 비로소 만나게 되겠지요.


내 터를 갖는다는 것은 정박할 공간이 있다는 안정감이겠지요. 그러나 생사의 경계를 지켜보면 그 터라는 것이 때로 얼마나 허무한 것이던가요. 평생을 일궈낸 터를 두고 결국은 소멸되고 마는 것이 생이잖아요. 생의 모든 것을 정박했던 터가 경매에 내몰린 현실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냉혹한 시장에 팔리는 불안한 눈빛의 난민으로 전락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것은 바닥을 향한 길 찾기를 하는 것입니다. 중력이 없는 우주의 유영처럼 그럴 때 시간의 흐름에 그냥 나를 맡겨야겠지요.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을 때까지... 바닥을 힘차게 발 구르기 할 때 삶은 상승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드러나듯 바닥이 밀어 올리는 삶의 그 깊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불면의 모서리가 돌아눕습니다. 어둠은 경계가 없고 눈빛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합니다. 뼈가 드러난 앙상한 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잠의 언어를 기다립니다. 어쩌면 기다림이란 물기 빠진 등에 흐르는 입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불면의 밤, 바늘 없는 시계에 고여 있을 잠의 바닥을 봅니다. 고분, 죽음의 문화로 풀어가는 삶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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