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단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품은 힘을 보는 것이라지요. 가슴이 떨릴 때 여행을 떠나라는 말처럼 삶은 순간순간 어떤 희열로 다가옵니다. 명작을 담는 공간인 미술관에서 문장을 깨고 나온 서사에 한눈을 파는 즐거움도 좋습니다. 평자들의 문장을 빌리지 않고 만나는 그림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아니 그림에게 끊임없는 말 걸기를 합니다.
미술관으로 오르는 골목은 담쟁이가 한창이었습니다. 담쟁이에 덮인 한낮의 담벼락은 초록의 황야로 보였습니다. 초록의 기세에 다른 그 무엇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아침이면 황야의 틈으로 푸른 물이 바위에서 내는 소리처럼 작은 꽃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아! 어쩌면 꽃을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이 가장 부드러운 첫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대에게 보내는 시선도,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도 그 순간 황야에 번지는 꽃일 테지요.
객혈하듯 쏟아내는 콘크리트 바닥 열기에 눈이 아립니다. 바늘 없는 시계에 고인 시간처럼 열기에 드러누운 그림자가 흡사 흑싸리 껍데기로 보여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고스톱이 위대한 철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선택의 순간에 놓인 인간의 딜레마... ‘스톱’할 수 있는 용기와 ‘고’할 수 있는 배짱사이에서 말이지요. 적게 먹고 길게 살아갈 것인가. 독박을 써 더라도 한번 호기를 부려볼 것인가. ‘고’로 밀어붙인 이후의 불확실성보다 ‘스톱’의 가능성에 무게중심을 두는 안전성...
혹자는 말합니다. 들고 나는 나들목의 시간을 잘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화투판의 화두라고요. 든든한 뒷배가 없어도 바가지 쓸 요량으로 가보면 뜻밖의 승부수가 생긴다고요... 돌이켜보면 단순한 듯 복잡한 게 맨화투라면 복잡한 듯해도 의외로 단순한 것이 또 고스톱이더라고요. 쭉정이는 쓸모없는 맨화투에 비해 쭉정이도 모이면 반전의 힘을 발휘하는 게 고스톱이잖아요.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역전의 용사라는 말이 있잖아요. 한패가 돌아갈 때마다 9점 10점 점수를 올리고 있는 사람이 ‘스톱’을 하지 않는 동안 3점이 된 사람이 ‘스톱’을 외칠 때의 짜릿한 낭패와 아찔한 승부수가 반전미를 주는 것도 고스톱 판의 일입니다. 결국 습관적 타성에 젖지 않고 오직 느낌으로 걷기의 판정패인 게지요. 그래도 화투는 손끝으로 읽히는 점자 같은 온기가 있습니다. 다만 도박이 되지 않을 때 말이지요
산이 경이로운 건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과 아직도 모르는 오솔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삶의 오솔길을 걷는 일입니다. 아니 나만의 오솔길을 가지는 것입니다. 찬란했던 여름날의 광휘도 언젠가는 누렇게 익을 것이고... 오솔길의 곱실거리는 풍경은 훗날의 서사가 되겠지요.
말복이 지났으니 이젠 우리가 가는 곳 어디든, 우리의 시선이 멈추는 어디서든 가을이 열리겠지요. 과일은 나무에서 익어가고, 그대 숨결은 밤새 더욱 달콤하게 흐를 테지요. 어느 날은 손가락 사이로 과즙을 툭툭 흘리며 한 바구니쯤 쌓아두고 먹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초록 껍질을 가진 아오리, 하얀 과육 사이로 배어 나오는 아삭한 과즙은 안도 다다오의 사과를 떠올리게 합니다.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절실함이 없으니 문장이 뻗어 나가지를 못합니다. 키보드를 톡톡 두드려봅니다. 딴엔 머루알 터지듯 어떤 글자들이 내게로 와 터져 주기를 바라면서요. 그러나 좀처럼 자음과 모음은 결구되지 못하고 겉도는 보리밥처럼 섞이지 못합니다. 사람사이도 섞이지 못하는 자음과 모음처럼 문장이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즙 같은 눈길이 스며들 때 형언키 어려운 황홀함이 되기도 합니다.
인생은 여행이라고들 합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행....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늙어가기 시작한다지요. 안티에이징을 꿈꾸지만 우리는 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늙음에 대하여, 늙어감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젊은 순간순간을 징검다리처럼 건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50대이지만 곧 60이 됩니다. 노년의 여행을 차곡차곡 준비해야 하는 때라면 성급한가요. 지식은 줄이고 지평은 넓히는 노년, 부피는 줄이고 감성은 키우는 노년의 여행을 준비해보려 합니다. 문장을 뛰쳐나온 감성으로 가슴 떨리도록 걸어보려고요. 문장을 뛰쳐나온 도시의 골목을 걸으며 문장을 뛰쳐나온 음악을 만나려고요. 노년의 인문학, 늙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