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기차를 탔습니다. 산 자의 가슴을 데워줄, 죽은 자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햇살을 마중하러 종묘로 갑니다. 해마다 시월이면 요동치는 마음에 온통 허우적거립니다. 그럴 때 그냥 그대로 받아주는 물길 같은 기차를 탑니다.
이른 새벽 청도를 지날 때, 서리 앉은 감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서울로 가는 빠른 기차를 타면서 청도 풍경은 쉬이 만날 수 없습니다. 기차를 탄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기에 언제나 설렙니다. 가고 오는 동안 내내 나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 속에 들어오는 첫 풍경에 모든 걸 쏟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는 여행을 나는 좋아합니다.
종묘. 정전 용마루를 흐르는 시월 햇살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정전 너머 광활한 하늘에 담긴 서울의 풍경을 보는 즐거움, 월대에 올라 박석을 걸을 때 정적을 삼킨 언어를 만나는 일은 시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그 순간 나는 살아있음의 희열을 발바닥으로 느낍니다. 내 살아있음의 표시... 온통 나를 흔들었던 가을 감성이 정전의 정적으로 인해 깨어나는 기쁨. 그 순간 시간의 강물 속에 첨벙거리는 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종묘는 내게 어린 언어로 유영해도 좋을 깊고 푸른 강물입니다.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간 정전은 보수공사 중이었습니다. 몇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소풍의 기대를 무참히 앗아버리는 소나기처럼 ‘공사 중’을 알리는 안내판에 그만 망연자실했습니다. 꼭 이 계절이어야만 하는, 꼭 그 시간이어야만 하는, 그래서 때를 맞추어 기차를 탔던 그 기대치가 헛디딘 발처럼 꺾이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오르지 말라는 금줄이 금부도사처럼 막아섰습니다.
미처 여물지 못하고 저무는 꽉 찬 가을 햇살처럼, 덜 여문 내 감정이 중첩되어 나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누군가 곁에 있었더라면 그의 어깨에 기대었을지도 모릅니다. 선암사 해우소 굽은 소나무에 기댄 한 사람처럼 나는 꺽꺽 소리 내어 울었을 겁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혼돈의 계절, 존재를 위해 소멸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이 너무나 벅차서 더욱 서러운 나를 그의 어깨에 문질렀을지도 모릅니다.
시월 종묘의 정전은 내게 선암사 해우소 굽은 소나무였나 봅니다. 세상이 모두 정적에 갇혀있을 때 나를 깨우는 죽비 같은... 막막함에 어찌할 바 없어 허둥거릴 때 길을 열어주는 기차표 같은 비상구인가 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해마다 지남철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기차를 타는가 봅니다. 죽은 자의 시간 속에 또각또각 걸어가는 산자의 피돌기, 낯선 도시 눈 익은 풍경으로 쏟아지는 가을에 나를 소멸시키기 종묘는 말없이 안아주니까요. 아니 오래된 사진첩처럼 나를 받아주니까요.
삶은 냉철한 듯해도 광활한 고독을 품은 그 속은 이토록 황홀한 것을 월대석을 통해 봅니다. 서로 다른 결이 어울려 온전한 하나를 만들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어제와 오늘을 봅니다. 아니 시간의 직조 속에 여물어가는 생의 이정표를 만납니다. 너의 시간 속에 중첩된 나를 보고, 나의 시간 속에 머물다 간 너를 보며 생의 무늬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기마병 같은 포말을 세운 동해바다처럼 붉은 깃발로 정렬한 열주의 팽팽한 긴장감이 주는 희열은 등뼈를 꼿꼿하게 세우는 어떤 힘이기도 합니다.
눈으로만 걸어야 하는 정전은, 한때 둘이 걸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혼자 걷는 사람의 헛헛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소멸되어 가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삶이란 영원하지 않듯이 함께 걷던 길을 혼자서 가야 할 시간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기억하다가, 기억되다가 마침내 한쪽의 기억이 소멸되고, 소멸된 기억을 한동안 끌어안고 있다가 점점 느슨해지는 골수처럼요. 어느 날은 마침내 그 기억마저 풀썩 내려앉겠지요. 기억의 마지막 산자가 사라질 때 비로소 죽음에 이르니까요.
늦은 밤 기차를 탑니다. 0시 3분, 부산역에 내릴 시간을 향하여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항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