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說(야매소설)

파라다이스는 그 순간에 고여 있었다. 1

by 규린종희


검은 돌 현무암을 빠져나오는 제주 바다는 어떤 이정표처럼 해마다 내게 길을 제시해 준다. 1월 바다빛깔은 마치 빙하가 녹은 물처럼 푸르게 맑다. 사람들은 그 빛깔을 에메랄드라고 하지만 나는 블루밀키스라고 부른다. 손가락으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물빛마저도 푸른 1월의 제주. 어쩌면 그 빛깔은 기억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지탱해 줄 힘인지도 모른다.


마침 강의 요청이 있은 터라 일주일을 서귀포에서 보내기로 했다. 여행의 시작은 질병관리청 백신접종 완료 프로그램 다운로드하기였다. 이젠 신분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접종증명이다. 부스터샷 접종 증명을 폰에 저장해 두는 일부터 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때처럼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겠다는 엉뚱한 상상에 괜히 웃었다. 낯선 도시에 가면 왠지 용기가 생긴다. 무엇을 하더라도 좋다는 생각과 함께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 주는 자유로움, 더욱이 혼자 가는 여행이 주는 묘한 기대치는 순간순간을 채우는 언어가 된다.


오래전 겨울 제주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조각처럼 불필요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던 정교한 외모에 순간 아찔함을 느꼈던 사람이었다. 제주가 주는 이국적 풍경 앞에서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을 볼 때의 경이로움은 어떤 말로 설명이 불가하다. 그럴 때는 눈으로만 그저 볼뿐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부산에서 그는 서울에서.. 서로의 일상을 벗어나야 만날 수 있는 제주의 하루는 일 년을 살게 하는 풍요로움이었다.

-블루밀키스 보러 가려고요. 마침 강의도 있고...

-연수받아야 해요... 일정이...


끝을 흐린 내 메시지에 그 또한 흐린 끝문장의 답을 보내왔다. 하긴 시간이 가능하다는 답을 보내왔다면 그건 엄청난 배려인지도 모른다. 괜히 흔들지 말아야지... 생각의 한 지점이 그 부분에 이르자 차분하게 있기로 했다.


가방을 정리하고. 선글라스를 챙기고. 책 한 권은 넣었다가 다시 뺐다. 제주의 골목 서점에라도 가면 기념으로 시집 한 권쯤 사리라. 여행지에서 읽을 수 있는 시집으로... 이즈음 그의 기분을 읽느라 한편 조신하게 있었다. 지난 오월 어느 날부터인가 가끔씩 보내오던 시그널을 줄인 사람이지 않은가. 그도 나도 통속의 가벼운 언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언어의 한 자락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도 한참이나 지나 시간.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새벽 4시가 지날 무렵 눈을 떴다. 엄지발가락 끝으로 힘을 밀어내어 일시에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며칠 비울 집이니 돌아올 때를 생각하여 정리를 했다. 화장품은 거울 앞에 가지런히 줄을 세우고 욕실엔 수건 두 장을 하얗게 접어 걸었다. 새로 포장을 뜯은 비누는 수전 옆에 두고 김 서린 거울은 말갛게 닦았다.


일상으로 돌아올 날, 이쪽과 저쪽의 감성이 분리되지 않기를 바라기에 마치 호텔의 침구처럼 모든 것이 처음인 시트와 욕실로 정리해 두는 것이 오랜 습관이 되었다. 설원처럼 하얀 침실 문을 조용히 닫고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아침을 흔들며 공항으로 간다.


-추워요 의복과 신발 잘 챙겨요.

지난밤 보내온 그의 메시지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골목을 내려가면서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었다. 말랑한 그의 말이 온기를 내고 있었다. 그래, 다른 길을 가끔 이렇게 함께 가기도 하지.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