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고, 끝내 건너지 않았다.”
기억나?
우리 처음 봤던 그 미술학원 말이야.
에어컨도 잘 안 나오고, 덥고,
그 특유의 비린 풀 냄새 같은 거 나던 화실.
이젤 앞에 앉아 엄지손가락 치켜세우고 구도 잡던 네 모습이 가끔 생각나.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너한테만 쏟아지는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멍하니 연필 소리만 듣고 있었어.
그때 알았던 것 같아.
내 세상은 이제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겠구나, 하고.
운 좋게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 되고,
네가 나를 ‘베프’라고 부를 때마다,
사실 나는 기쁘면서도 조금씩 아팠어.
야자 시간에 몰래 마시던 바나나맛 우유.
매점 벤치에서 같이 보던 파란 하늘.
그런 소소한 일상들이 다 좋았는데,
동시에 네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칠 때마다,
심장이 주체 못 할 정도로 쿵쾅거려서…
그게 들킬까 봐 무서웠거든.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어.
선배 형 고백 편지를 대신 전해주던 날,
나 진짜 바보 같았지?
지갑 속에 숨겨둔 내 편지는 꺼내지도 못하고,
억지로 웃으면서 “잘해보라” 말했잖아.
네가 수줍게 웃는 게 예뻐서,
그걸 지켜보는 걸로 충분하다고 나 자신을 속였던 것 같아.
졸업식 날, 네가 뛰어오면서 그랬잖아.
“정말 고마워. 다행이야, 네가 내 친구라서.”
그 말 한마디에 내 3년 짝사랑이
‘다행’이라는 단어 속에 갇혀버린 기분이었어.
그래도 너한테는 제일 환하게 웃어줬어.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으니까.
나중에 들었어.
네가 지금 만나는 사람 이름이 나랑 똑같다며.
사람들이 왜 하필 그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네가 “그 이름만 들어도 그냥 좋았다”고 대답했다는 말.
한참 멍하니 있었어.
이제야 알 것 같아.
우리 둘 다 서로를 잃기 싫어서,
각자의 선 밖에서 맴돌기만 했다는 걸.
내가 망쳐놓을까 봐 겁냈던 그 구도가,
사실은 너도 지키고 싶었던 우리 거리였다는 걸 말이야.
그 사람의 이름이,
우리가 끝내 건너지 못했던 그 여름에 대한 유일한 답장이라고 생각할게.
다행이야.
나도 네 친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