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욕심은 자폭 스위치가 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만난 욕심의 참혹한 결말

by 조강

이게 진짜 필요한건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구매욕에 휩쓸려서 무작정 구매한적이 있다. 아주 많다. 마감 세일이라고 해서 사고,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사고, 1+1이라서 구매하게 된다. 이게 진짜 필요한건지 어디에 언제 필요한건지 따져보지도 않고 장바구니에 담게 된다. 당장에 나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이 나의 '소유욕'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구입한 물건들은 냉장고에서 혹은 창고에서 사용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다 쓰레기 처리장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물건을 판매하는 마트나 광고를 집행하는 판매자입장에서는 물건을 사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야 매출을 올릴 수 있다. 매출을 올려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다. 경쟁력 없는 물건은 판매되지 않고 판매자는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다. 생존논리가 저변에 깔려있다. 그리하여 필사적으로 광고를 하고 하나라도 더 판매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 입장에서도 판매자의 의견을 듣고서 본인에게 필요한지를 따져 물어보는 질문이 필요하다. 판매자들에게 광고를 금지시킬 수도 없고, 마트에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외부의 변수을 통제할 수 없다면 내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점에서 사실관계와 더불어 인과관계를 필터링 해보는 과정이 필수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물건을 사면 어떻게 될까?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필요없거나 필요성이 희박한 상품을 1+1 행사라는 이유로 구매한다고 해서 먹는 양이 갑자기 1+1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대신 먹어줄 사람을 부를 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소비기한이 지난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보다는 필요한 소량만 구매하게 될 것이다. 또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파악해서 미루어보면, 새로운 상품에 대한 필요를 다시 생각해볼만한 여지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물건은 내 눈앞에 있고, 원인관계를 생각하는 나의 자아는 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는 근본적인 질문이 바뀌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 물건이 구매할 필요가 있는지를 물어보는게 아니라 물건을 왜 구매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판매자가 제시한 화려한 광고를 기반으로 한 합리화가 일어나게 되다. 결국 필요 이상의 물건을 구매해서 집에 돌아오게 된다. 필요는 무한정 늘어나지 않으므로 쓰레기장에 버리는 품목이 한개 더 늘어나게 된다. 이건 어떻게 버리지 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내가 이 물건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서 왜 사야되나로 바뀌었고, 최종적으로는 어떻게 버려야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왜 물건의 필요를 생각하다 처리방법을 고민하게 될까. 바로 욕심 때문이다.


개인의 욕심은 내 눈앞의 현실을 왜곡한다. 오랫동안 내가 지켜온 신념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펼쳐진 강한 자극은 쉽게 극복하기 힘든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로 인해 현재 상황 파악을 희미하게 만들고, 근본적인 질문을 바꾸게 되며, 완전히 새로운 질문에 직면하도록 만들어버린다. 5M 앞의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었던 사냥꾼이 내 눈앞에 있는 총만 보이도록 만드는 그 원흉이 바로 개인의 욕심, 탐욕이다. 일본의 역사 중에서 왜곡된 현실판단으로 정반대의 결과를 얻은 인물이 있다. 한국인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이자, 일본에는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다.


세키가하라 전투, 일본의 주인이 바뀌다


히데요시 그리고 금쪽이 히데요리

전국시대가 끝나고 일시적인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일본은 다시 한번 서군과 동군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은 진정한 일본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증명한 사건이며, 동일본과 서일본을 나누는 변곡점이 되었고,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넘어가게 만든 일본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있었다. 그들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본를 통일했던 히데요시는 왜 다 차려진 밥상을 이에야스에게 넘겨주게 된 걸까?


사건을 보기 위해서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킬 당시로 가봐야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뒤를 이어 일본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무사들에게 나눠줄 영지를 확보하고 남은 군사력이 집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외 파병을 기획하게 된다. 그 목적지는 바로 명나라 옆에 위치한 조선이었다. 1592년, 일본은 15만의 대규모 군사를 조직하여 명나라로 가기 위한 길을 열어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전쟁이 한참 이뤄지던 시기에 히데요시에게는 개인적인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뒤를 이을 직계혈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2명을 낳은 적은 있으나 일찍 죽어버렸으므로 이미 히데요시는 직계 혈통에게 권력을 이양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불과 1년 뒤 히데요시의 금쪽이이자 본인의 권력을 이양받을 아들이 태어난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다. 히데요시가 56세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자, 텐노에게 특별하게 하사받은 토요토미(豊臣) 가문을 이어갈 적통자손이었다. 토요토미(豊臣)라는 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의 혈족들이 800년간 이어온 겐지(源氏), 다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 4대 국가급 가문이 있었다. 여기에 오직 히데요시만을 보고 텐노가 내려준 성이 토요토미 였던 것이다. 성(苗字)도 없는 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4대 명문가에 버금가는 권력을 얻은 것이다. 나중에 사용하는 하시바(羽柴)라는 성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있을 때 선배 가신들의 이름을 한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었다. 즉, 오직 본인의 노력만으로 5대 가문을 새로 만들어버린 히데요시는 일본의 지배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인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이미 자신의 조카 하시바 히데쓰구(羽柴秀次)에게 권력을 이양한 상태였고, 본인은 관백(関白) 위의 태합(太閤)의 지위에 있었다. 여기서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욕심, 탐욕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마지막 힘을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너무나도 소중한 아들, 히데요리를 위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생겨나게 된다.


하시바 히데쓰구는 누구인가?

하시바 히데쓰구는 누가 봐도 관백의 지위에 오를 명분과 실력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에서 사망하고 난 후,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배경에는 히데쓰구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기존 영토가 킨나이(교토와 오사카 인근)와 주부(나고야 인근)에 머물러 있던 지배력을 큐슈, 혼슈 서쪽과 북쪽, 시코쿠를 점령하면서 토요토미 가문의 지배력은 일본 열도 전체로 퍼지게 된다. 간토 지방(지금의 도쿄)의 호조를 멸망시킨 오다와라 정벌에 나선 것도 히데쓰구였다. 이에야스가 지배하던 비옥한 영지는 히데쓰구에 돌아가게 된다. 영지를 뺏긴 이에야스는 척박한 땅인 간토 지방으로 가게 된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여지가 남아있는 이에야스를 간토로 보내면서 힘을 빼려고 했던 것이다. 토벌 전쟁을 수행하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히데쓰구는 많은 다이묘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관백에 오른 히데쓰구는 일본 본토에서 전쟁을 지탱하는 총사령관으로써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바로 잡고 다이묘들의 권력을 견제했다. 히데요시의 마지막 정벌이었던 조선 정벌을 군사적, 행정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이다. 전시 상황이 끝나면 히데쓰구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제2의 히데요시였고, 관백으로써 평화로운 일본을 이끌어나갈 차세대 리더였다. 따라서 관백에 오르면서 히데쓰구 또한 하시바라는 성을 버리고 토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변수의 등장, 히데요리

임진왜란 1년 뒤이자 히데쓰구가 관백에 오른지 2년이 채 안된 시점, 히데요시의 적장자 히데요리가 탄생한다. 죽기 직전에 본 아들이었고 이전에 요절한 아들들이 겹쳐보이면서 히데요시는 애지중지 하며 히데요리를 키우게 된다. 이미 일본을 통일했고,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칼을 들게 된다. 과거와 차이가 있었다면 일본을 통일하고 안정된 나라를 세우겠다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히데요리를 위한 나라를 세운다라는 다소 협소하고 개인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히데쓰구는 일본의 번영을 위한 차세대 리더에서 순식간에 히데요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 버린다.


히데요시는 먼저 이미 관백에 올라있던 히데쓰구가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를 조작해서 할복을 명령한다. 이에 히데쓰구의 가신들도 함께 할복하였고 처자식 총 39명을 한번에 참수해버린다. 그들의 시신은 제대로 안장되지도 않고 구덩이에 던져넣은 다음 ‘『殺生関白の墓』살생관백의 무덤’이라는 치욕적인 문구로 히데쓰구 집안을 멸망시켜버린다. 더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여기에는 히데쓰구의 측실로 내정되었으나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는 15세의 코마히메(동북 지방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모가미 요시미츠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어린 여자이자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히데요시의 기분에 따라 가문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이 자리잡게 된다. 당연히 모가미 요시미츠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 편인 동군에서 싸우게 된다. 즉,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이 공감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권력욕심을 관철시켰고, 그 정점에 히데요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 히데쓰구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 다이묘들을 도와준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히데요시와 넓은 아량을 베풀었던 이에야스가 있었고 권력의 무게추는 점점 이에야스로 기울게 된다.


한편, 명나라와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이어가던 사이 전쟁의 총 지휘관이었던 히데쓰구의 할복으로 보급, 행정 체계는 마비되었고 문치파와 무단파의 파벌싸움은 극에 달하게 된다. 안그래도 이순신 장군의 강력한 수군으로 곤란을 겪었던 일본이었지만 내부 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일으킨 정유재란에서 싸워야만 했고 그 유명한 명량 대첩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울돌목에서 격파시켜 버린다. 또한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급하게 전쟁을 종결하고 퇴각하는 일본군은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을 노량 대첩에서 만나 대패하며 일본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히데요시 본인의 의지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스스로 자신의 일을 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히데요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한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 가장 권력이 강했던 5명의 다이묘를 모아서 오대로(五大老 -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도 토시이에,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구성하고 히데요리를 지지하도록 부탁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임진왜란 전쟁도 급하게 마무리 되었고, 권력자의 부재 사이에서 파벌 싸움은 극에 달했다. 그 중심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ー문치파)카토 기요마사(加藤清正ー무단파)가 있었다. 오대로는 사실상 경제력과 군사력이 가장 강했던 이에야스과 나머지 4명의 견제 구도였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히데요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가진 후견인 자리를 이에야스에게 맡기게 된다. 사실 히데쓰구가 관백에 그대로 있었다면 후견인이나 오대로 따위의 기관도 모두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아무리 힘이 강했다고 하더라도 관백의 지위에서 일본을 통치하는 히데쓰구에게 직접적인 전투를 감행하는 건 엄연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부재, 파벌싸움의 시작

전쟁 당시 전장에 나가서 목숨걸고 싸운건 무단파였으나 그들의 공로를 확인하고 결정하는 건 문치파의 행정이었다. 무단파는 전쟁에 대한 공로를 임의적으로 해석하여 보고했던 문치파의 수장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고, 결정적으로 히데쓰구를 숙청하는데 문치파가 적극 일조하면서 갈등은 극에 달한다.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무단파의 수장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7명의 장수는 교토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습격하게 된다. 미츠나리는 원수였던 이에야스에게 피신하며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다.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새로운 권력의 시작

5대로 중 실질적으로 이에야스를 견제할 수 있는 마에다 토시이에가 사망하자 이에야스히데요시의 유언이었던 다이묘간 혼인금지 위반을 어기면서 다이묘들을 결집한다. 세력이 확장되자 5대로 중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 이어 5대로에 참여한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에 오대로 체제는 무너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교토에서 자리를 비우자 문치파 미츠나리는 지금이 기회다고 판단하여 거병하게 된다. 사실 이에야스의 진짜 목적은 우에스기를 공격하려고 했던것이 아니라 미츠나리가 거병하길 기다린 것이다. 결국 간토지역으로 원정을 나간 동군은 교토 쪽으로 이동하고, 교토에서 거병한 미츠나리는 간토 쪽으로 행군을 하면서 양군이 대립한 곳이 바로 세키가하라(関ヶ原)였다.


전통적으로 교토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関西) 지역이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다. 그리고 일본 동쪽에서 간사이(간사이라는 말 또한 세키가하라 서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이름이다) 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키가하라 지역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검문소(関所)인 후와노세키(不破の関)를 세워 감시도 하고 세금도 거두는 시설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지역은 검문소가 있는 넓은 평원(原)라는 뜻으로 산맥으로 둘러싸인 좁은 분지 지형이다. 역사적으로는 이에야스와 미츠나리의 전쟁 뿐만 아니라 아스카 시대에도 서군과 동군의 전쟁(진신의 난)이 벌어졌던 곳이다. 즉, 세키가하라는 일본의 주인이 바뀔 때 마다 피로 물들었던 운명의 땅이었다.


단 6시간의 전쟁

이에야스카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한 동군과 미츠나리모리 테루모토를 중심으로 한 서군의 병사는 총합 20만에 달했다. 하지만 전쟁은 허무하게도 단 6시간만에 끝이 나버리고 만다. 이 싸움은 이에야스미츠나리의 신경전이 아니라 일본 전체의 진짜 주인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에야스는 전쟁이 시작 되기 전 수백통의 편지를 보내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맞춤형 공약’을 약속했다. 심지어 전쟁에서 동군에 속해 싸우지 않더라도 그저 방관만 하는 것 만으로도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겉으로는 우에스기를 치러 가겠다는 명분으로 간토에 머물던 그 시기, 이에야스는 한편으로는 미츠나리가 거병할 것을 기다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이묘들을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전쟁은 칼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이에야스의 전략대로 다이묘들은 자신의 실리(実利)리를 따져보게 된다. 결국 서군이 훨씬 우세한 형국이었으나 히데쓰구의 숙청, 무단파의 불만, 권력자의 부재로 인해 일본의 주인이 누군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린 다이묘들은 방관하거나 혹은 배신하면서 전쟁은 단 반나절 만에 동군의 압승으로 마무리 된다. 이로 인해 새로운 일본의 주인이 결정되었고 서군에 가담한 88개의 다이묘들은 영지를 빼앗기고 멸망하게 된다. 이에야스는 텐노로 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쇼군)의 직위를 하사받고 간토(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세우게 된다. 이로써 토요토미(豊臣) 가문 또한 권력자에서 일개 다이묘로 강등된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오사카 전투를 일으키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히데요시의 소중한 아들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 구석에서 자결하게 된다. 그의 나이 불과 21세 때 일이다. 결국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당하게 되고, 일본의 중심은 오사카에서 도쿄로 넘어가게 되었고, 260년간 이어진 팍스 도쿠가와, 에도막부(江戸幕府)시대가 시작된다. 히데요시 개인의 탐욕이 결과적으로 본인의 소중한 아들, 히데요리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집착은 멸망의 시작

문치파와 무단파의 갈등, 히데요리의 탄생, 히데요시의 죽음, 이에야스의 부상은 모두 일개 사건에 불과했다. 천한 농부 출신의 히데요시가 텐노로 부터 특별히 하사받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킨 것은 히데요시의 생각의 변화에 있다. 일본을 통일하며 강력한 권력을 차지할 만큼 비전과 능력이 출중했던 그였으나 죽기 직전 만난 너무나도 소중한 아들 히데요리의 등장은 히데요시의 눈을 덮어버렸다. 히데요시가 단기간에 이익이 아니라 100년을 내다봤다면, 혹은 개인의 욕심이 아닌 일본의 번영을 생각했다면 히데쓰구를 숙청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자의 욕심만큼 강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없다. 전국의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모두의 일본을 위한 비전을 세우던 권력자가 토요토미 히데요리만을 위한 일본으로 만들겠다는 탐욕을 품는 순간, 역사를 보는 시야는 좁아졌고 권력자로써의 자격은 이미 박탈당한 것이다. 무단파의 카토 기요마사는 어릴 적 부터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통일에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를 대신해 미츠나리가 권력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는 이에야스에 편에 서서 싸우게 된다. 토요토미 계의 다이묘들 또한 그들이 동참할 대의가 사라지자 자신만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동군에 서게 된다.


권력자의 탐욕은 새로운 대의로 교체될 수 밖에 없다. 대의를 잃어버린 일본에서 이에야스는 무사들의 불만을 통합할 수 있는 이익과 명분을 동시에 제시한다. 영지를 배분해줄 것을 약속하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일본을 좌지우지 하려고 하는건 역적 미츠나리 때문이다는 명분을 세워주면서 일본을 하나로 만들 비전을 세운다. 당시 다이묘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통합할 수 있는 대의를 세우는데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이에야스가 원했던 건 일본의 평화였고 힘을 가진 다이묘들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장애물이 아닌 지지대가 되었다.


요약

개인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판단력을 떨어뜨린다

낡은 생각은 새로운 생각에 의해 대체 된다

권력은 칼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다


이건 내 욕심인가?

필요한 물건을 사러 마트에 갔지만, 예상치 못한 선택에 기로에 놓이게 된다. 할인한다고 해서 물건을 필요이상으로 더 구매하는게 맞는 일일까? 신발은 아직 신을 만한데 새로 유행하는 트렌드를 따라가야 하는 걸까? 과연 이 물건이 나한테 진짜 필요한 물건은 맞나? 개인적인 욕망이 고개를 들고 일어날 때 세키가하라 전투를 생각해보자. 개인의 욕심이 과연 뭘 가리고 있는지. 당장에 마트를 빠져나올 때 느끼는 희열인가, 일주일 뒤에 음식물 쓰레기에 버릴 때의 좌절인가. 내가 물건을 구매하는 건 나의 어떤 욕구를 채워줄 수 있고, 지금 당장이 아니라 시간이 일주일, 한달, 1년이 지나도 지금의 선택은 옳은 것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권력 정점에 섰던 사람도 개인적인 욕망에 흔들렸던 걸 보면 왠지 위안이 된다. 욕망에 흔들려 고뇌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본성이라는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요토미가 죽은지 5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그의 오판에서 어떤 참혹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위로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소중한 아들을 죽게 만든 것 처럼 무분별한 소비는 나의 어떤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게 될까?


물건을 파는 마트나, 상품을 진열하는 판매자들은 오늘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다만 마트를 장애물로 볼 것인지 지지대로 볼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문제다. 개인적은 욕심은 절대 대의가 될 수 없다. 낡은 생각으로는 낡은 결과 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은 대의를 가지고 마트에 가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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