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살다 보면 생존을 위해 전혀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1853년 250년간 이어져오던 일본의 에도 막부에는 커다란 위협의 존재가 등장한다. 시대는 빠르게 바뀌고 있었고 막부 또한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막부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1853년 에도에 미국의 흑선이 찾아온다.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태평양에서 보급로를 찾아야 했던 흑선은 일본을 개항하기 위해 통상요구를 한다. 막부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고 이를 제압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했으나 당시의 막부는 그럴만한 군사력도 재정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조만간 다시 올 것이라는 예고를 하고 돌아갔으나 일본 내에서는 서양의 침략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막부는 결국 1년 만에 다시 찾아온 미국에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函館) 2개의 항구를 열어주고 단순 보급의 역할만을 먼저 허용한다. 이게 1854년의 일이다.
단편적인 통상에 만족하지 않았던 미국은 정식 통상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아시아에서 강력한 국가였던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이라는 나라에 굴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청의 패배 소식을 들은 일본은 서양을 받아들여서 우리도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과 서양을 무력으로 무찔러야 한다는 2개의 의견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또한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를 이을 후계자를 두고도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와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지지하는 2개의 세력으로 쪼개진다.
잠시 도쿠가와(徳川) 가문에 대해 알아보자. 일단 에도 막부의 쇼군은 무조건 도쿠가와 출신이어야만 했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이 없어지면 막부도 망하게 된다. 따라서 후계자가 끊길 위험을 대비하여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산케(御三家-3개의 가문)라는 가문의 연합체를 두고 쇼군을 임명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고산케는 원래 주인인 에도 중심의 본가와 더불어 나고야를 거점으로 하는 오와리 도쿠가와, 와카야마를 거점으로 한 키슈 도쿠가와, 마지막으로 이바라키현(미토)에 거점을 둔 미토 도쿠가와 가문으로 구성된다. 서열상으로 오와리, 키슈, 미토 순서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오와리에서는 단 한 번도 쇼군이 나오지 않았다. 고산케 연합체에서 새로운 쇼군을 임명해야 하는 상황에 대권 주자 중 이에모치는 키슈 출신이었고 요시노부는 미토 출신이었다. 특히 요시노부는 정치, 외교 능력이 출중했던 인물이었다.
1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병약하여 사경을 헤매자 대로(大老)에 위치에서 쇼군을 보좌하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놀랍게도 텐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미국과 정식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결국 미국의 끈질긴 통상요구에 응하여 1858년 일본은 정식으로 미일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영사재판권, 추가 항구 개항 등의 내용에 서로 협약하게 된다. 하지만 나오스케가 체결한 미일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고, 막부의 무능력에 비판하는 세력이 늘어나게 된다.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과 지식인들은 막부의 부당함에 대해 그리고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 진언을 하지만 이이 나오스케는 듣기 싫은 말을 계속하는 다이묘와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려 한 게 아니라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대로의 위치에서 숙청을 집행한 이이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세울 때 공로를 인정받은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중 서열 1위였던 곳이 이이 가문의 히코네 번(彦根藩) 출신이다. 이이 가문의 14남으로 태어나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나오스케는 은거하면서 국학과 다도를 배우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이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이 나오지 않자 후다이 다이묘의 일인자로 등극하면서 쇼군 위에서 섭정을 펼칠 수 있는 대로(大老)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15년 동안 은거하며 학문을 닦은 나오스케였으나, 권력을 잡은 후 시대를 제대로 읽는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연장선에서 텐노를 베재하고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거나 허수아비 쇼군을 세우는 실수를 저지른다.
물론 미국과의 불평등조약 체결은 나오스케의 개인적 판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굴욕적인 조약이었기 때문에 내부의 반발은 거셌다. 나오스케는 여론의 반대에 대처하는 법 또한 서툴렀다. 1858년 10월 막부에 반기를 든 다이묘와 지식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숙청 작업을 시작한다. 심지어 오와리 도쿠가와 출신의 도쿠가와 요시카츠도 무칙허 조약체결에 항의하다 유배를 당하게 된다. 나오스케는 숙청을 통해 반발을 억압하고 그해 12월, 키슈 출신의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14대 쇼군으로 옹립한다. 이에모치는 불과 12세에 불과했으므로 막부를 본인 마음대로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일본 내에서는 막부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된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지만 일본 내의 권력은 본인이 잡아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안세이(安政) 5년에 있었던 대숙청의 비극, 안세이대지옥(安政の大地獄)이었다.
안세이 5년 10월, 이이 나오스케가 시작한 안세이대지옥으로 지식인과 다이묘뿐만 아니라 텐노를 보좌하는 교토의 귀족들까지 지식인들과 낭인들과 함께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 여기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이토 히로부미(일본 초대 내각총리, 헌법 제정), 키도 타카요시(폐번치현으로 행정 시스템 구축), 야마가타 아리토모(일본 근대 군대 창설) 등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의 스승이었다. 텐노를 중심으로 일본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하시모토 사나이가 불과 15세에 쓴『계발록』은 지금도 일본 교과서에 실려있을 정도로 당대의 국가급 브레인이었다. 명석한 요시노부가 새로운 쇼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아주 작은 비판만으로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했고, 에도의 감옥은 빈자리가 없을 만큼 가득 차게 되었다. 지식인, 귀족, 다이묘 그리고 그 하부의 가신들 까지 수백 명이 잡혀가거나 사형을 당했다. 이로 인해 나오스케가 휘두르는 막부는 신뢰를 잃어버렸고, 일본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당시 지식인들과 다이묘들의 주장은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는 걸 넘어서 서양의 기술을 배워서 국가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어리고 정치능력이 없는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아닌 머리가 비상한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세워서 일본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이 나오스케가 이렇게 까지 참혹한 숙청을 집행한 이유는 14대 쇼군을 누구로 둘 지에 대한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쉽게 말해 이에모치가 쇼군이 되면 본인이 권력을 잡고 막부를 통제할 수 있지만,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 이 모든 게 불가능해지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탐욕으로 인해 막부를 절벽 끝까지 몰아세운 인물이 되어 버렸다. 본인도 포함해서 말이다.
안세이 지옥의 가장 충격적인 숙청은 쇼군에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와 그의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를 처벌한 것이다. 미토 도쿠가와 출신이었던 요시노부는 가택 연금에 처하게 되었고, 쇼군 자리에서 밀려나 칩거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일본의 지식인들과 다이묘들이 숙청되어 가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만약 본인이 군사를 움직여 나오스케를 처단하면 쇼군을 대신하여 막부를 지키는 대로(大老)를 공격한 악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토번 사람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다이묘가 이 수치를 당한 건 나오스케 때문이라고 판단하였고, 결단을 내리게 된다.
1860년, 이이 나오스케는 폭설이 오는 겨울 어느 겨울 날 여느 때 처럼 에도성으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마침 폭설이 내린 날이었기 때문에 나오스케가 타고 있던 가마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에도성(지금의 텐노의 거처인 황거)의 입구인 사쿠라다몬 앞에서 미토번의 낭인들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텐노를 완전히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서양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쇼군을 자신의 아래에 두면서 일본을 사유화하려고 했던 개인의 최후였다. 이후 일본은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어떻게 해서든 바로 잡아야 했고, 막부 중심으로는 더 이상 일본이 생존할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참고로 이봉창 선생이 쇼와 텐노를 암살하기 위해서 수류탄을 던진 곳이 이곳이다.)
이 사건으로 요시노부는 쇼군을 대리하는 대로를 죽인 가문으로 찍히면서 멸문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정치의 중심에 다가서 15대 쇼군이 되기까지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망해가는 막부를 위해서 그리고 일본을 위해서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고, 쇼군에 취임한 지 불과 1년 만에 전후무후한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논어 계씨 편 11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견선여불급, 견불선여탐탕)
“선(善)을 보면 미치지 못할까 봐 서두르고, 악(不善)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을 넣은 듯이 놀라 즉시 피한다.”
악(不善)은 보고 뜨거운 물에서 몸이 자동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옆에 두고 있으면 서서히 정신이 죽어가기 때문이다. 이이 나오스케는 오랫동안 은거하면서 학문을 폭넓게 쌓았지만 시대를 읽는 눈을 얻지는 못했다. 1853년 서양은 산업혁명으로 생산물이 넘쳐나 식민지라는 소비시장을 필요로 했고 전쟁이 밥 먹듯이 일어났고, 그 영향이 일본까지 닿았던 시기였다. 지금 역사를 보는 우리들은 당대의 올바른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기술력을 배우고 군사력을 키워서 전쟁으로부터 자국을 독립시키고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250년 동안 이어져온 막부는 완전히 새롭게 혁신하거나 그게 안된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오스케 또한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몰락해 가는 것을 봤고 일본을 지키기 위한 선(善)은 막부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는 것이었고, 이는 결국 자신의 가문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도쿠가와 출신이 아니므로 쇼군에는 오를 수 없으나 대로라는 직책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결국 나오스케는 자신만의 권력을 지키는 걸 선(善)으로 보았고, 이를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다이묘들을 악(不善)으로 본 것이다.
심지어 악(不善)을 보고 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뜨거운 물(湯)에 넣어 질식시켜 버리는 희대의 오판을 내리게 된다. 그는 스스로 악(不善)이 되었고, 권력을 잡은 지 불과 2년 만에 시대를 움직이는 힘에 의해 역사에서 제거되었다. 진정한 선(善)과 악(不善)을 보는 눈을 기르지 못하면 본인이 악으로 변하게 되고 뜨거운 물이 되어버릴 수가 있다. 나오스케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악이었고, 서양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건 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직 본인만을 위한 이익을 좇는 탐욕은 시대의 선(善)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