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의 나는 늘 결과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었다.
잘 되면 하루가 살 만했고,
어긋나면 그날은 통째로 실패한 인생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애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얼마나 단단해지고 있는지도 늘 뒷전이었다.
결과만 좋으면 괜찮은 사람,
그게 나였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 결과 중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돌이켜보면 결혼 초 10년은
참 많이도 팍팍한 시간이었다.
조금 더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자란 나와
늘 빠듯한 현실을 먼저 배워온 남편.
우리는 돈을 쓰는 기준도,
돈을 대하는 감정도 달랐다.
외식 한 번에도 망설임이 먼저였고,
장을 보러 가서는 계산대 앞에서 서로의 눈치를 봤다.
커피를 마시러 가도 두 잔을 온전히 시켜본 적은 거의 없었고,
택시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어느 날은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와
슈퍼에서 바나나 우유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건 사치일까?’
결국 하나를 사서 남편과 나눠 마셨고,
집에 돌아와 가계부에
‘바나나 우유 800원’을 적었다.
그 숫자를 적는 내 손이
유난히 작고 초라해 보였다.
돈 때문이 아니라,
내 삶이 너무 잘게 쪼개져
계산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모아서 과연 모이긴 할까?”
막막함과 불안은
하루에 한 번쯤 꼭 찾아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버틴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그 시간은 성실했지만 여유는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 꾸준함은 조용히 나를 바꾸고 있었다.
어떤 날은 결과가 나를 위로했고,
어떤 날은 노력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 결과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결과는 잠깐 스쳐 가는 순간이지만,
과정은 나를 만들어온
수많은 하루의 총합이라는 것을.
40–50대가 된 지금,
주변을 둘러보면
마치 인생의 성적표를 받아 든 사람들처럼
누군가는 회사에서,
누군가는 자녀의 입시에서
각자의 희비를 마주하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나 역시 그 성적표에
마음이 크게 출렁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숫자들 앞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법을 배웠다.
젊은 시절 그렇게 애타게 붙잡았던
‘좋은 결과’는
결국 내 삶을 바꿔주지 않았다.
나를 바꾼 것은
힘겨운 날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꾸준함,
다시 일어서게 했던 아주 작은 성취들,
그리고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쓴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결과보다 하루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문제보다 배움의 순간을 찾으며
중년의 시간을 차분히 건너고 있다.
오늘도 특별한 성과는 없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성적표도 없다.
다만 마음이 예전보다 덜 조급하고,
나 자신에게 조금 덜 야박해졌을 뿐이다.
그 정도 변화라면,
이 인생은 과연 실패한 삶일까.
아니면 이제서야
제 점수를 스스로 매기기 시작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