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니는 비누방울맨
님아, 그 생수를 마시지 마오
나는 광산 김가다.
본가의 우리 가족 구성원은 아빠와 (나주 정씨이자 명예 광산 김가인) 엄마, 그리고 삼남매로 이루어져 있다.
예로부터 광산 김씨는 빛날 광(光)을 쓰는 성씨였으나, 내가 속한 광산 김가는 미칠 광(狂) 자를 쓴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는 광기 어린 광(狂)산 김씨의 시조라고 하겠다. 그만큼 우리 가족들은 다들 약간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미친 사람인 양 세상을 즐겁게 산다. 농담 반 진담 반인 이야기다. 13년을 함께 지낸 남편이 아직도 우리집 에피소드를 듣고 기겁할 때도 있으니, 어쩌면 진담의 비율이 좀 더 높을 수도 있겠다.
때는 2014년, 내가 한창 임용고시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던 때였다.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다급히 걸려왔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막내 동생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도대체 몇 명이 동시에 떠들어제끼고 있는지 도통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듯이 왁자지껄하게 웅성거리던 목소리는 우리집 대장군인 둘째 동생이 전화를 이어받으며 사그러들었다. 둘째는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때는 저녁 8시경, 내 소꿉친구인 지현이가 우리집에 놀러와 있을 때였다. 지현이는 친구 없는 친구 집에 하숙생이나 다름없이 멋대로 들락거리곤 했는데, 친구 동생도 자기 동생처럼 부려먹는 뻔뻔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외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랫사람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친구였다.
늘 그렇듯 마치 본인의 집인 것마냥 우리집 방바닥에 늘어져 있던 지현이는 목이 말랐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일에 막내가 동원되는 것은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집 막내는 누나 친구의 심부름까지 도맡곤 했으니 특히 더 열악한 환경의 막둥이였다.
“막내야, 나 물 한 잔만.”
“예이.”
그 소리를 들은 아빠가 안방에서 ‘나도!’를 외쳤다. 귀여운 우리 막내는 부엌에 있는 페트병에 들어있던 생수를 컵에 한 잔 따라서 누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아빠에게는 생수에 얼음까지 동동 띄워드린 채 배달을 마치고서야 다시 앉을 수 있었다. 막내 짬밥 10년이면 물심부름도 취향껏 하는 법이다.
지현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특이한 버릇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뭔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냄새를 먼저 맡아보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지현이는 별생각 없이 킁킁대며 생수 냄새를 맡았다.
“야, 이거 꽃차야?”
“왜?”
“엄청 향긋해. 냄새가 좋아.”
“아닐걸. 그냥 생수인데.”
“맞다니까. 내기할래? 아줌마 차 끓이신 듯.”
한 입 호로록 마신 지현이는 곧바로 웨엑, 하며 그걸 뱉어냈다.
“야, 이거 맛이 이상해.”
“엥? 물 맞는데?”
“아니라니까?”
“어, 누나. 입에서 거품 나온다.”
지현이는 입에서 부글거리는 거품을 뿜으며 ‘보글보글 게거품이다!’ 하며 깔깔댔고, 옆에 앉아있던 둘째 동생도 그걸 보더니 박장대소하며 그 웃음에 가세했다. 거품이 향기롭다느니 어쩌구 저쩌구 우스갯소리를 하며 셋이서 재미난 해프닝에 대해 신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아, 언니 진짜 웃기다.”
“그니까. 뭔데, 이거? 세제 아님?”
그 말에 막내가 무언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뛰쳐나가며 외쳤다.
“아!!! 아빠!!!!!!”
지현이와는 반대로 아빠에게는 무슨 액체든지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한방에 비워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게 이 사건에서의 가장 불운한 점이었다. 얼음 띄운 시원한 세제를 호쾌하게 원샷하신 아빠는 이미 입에서 거품을 미친듯이 뿜어내고 계셨다.
그 직후 아빠는 화장실로 달려가신 후 거의 반 시간을 미친듯이 토하셨고, 지현이는 곧바로 119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혹시라도 사설 앰뷸런스가 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온다면서 전화하지 말라고 하셨단다(전국의 자린고비들을 모아다가 한 줄로 세워놓으면 아마 우리 아빠가 앞에서 한 열 번째 정도에는 서 있을 거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동생들이 나에게 일단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 무조건 119를 부르라고 엄포를 놓았다. 차도 없고 시간도 늦어 당장 본가에 내려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초조하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공부고 뭐고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1시간 정도 뒤에 지현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직접 운전을 하셔서 동생들과 다 같이 병원에 다녀왔는데(진짜 독하다 독해……) 운전을 하시면서도 입에서 끊임없이 보글보글 거품이 튀어나왔단다.
이 사태를 뒤늦게 전해들은 엄마가 일하다 말고 헐레벌떡 병원으로 뛰어오셨는데, 의사 선생님께서는 다행히 세제를 이미 전부 다 토해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건강에 이상이 생길 정도는 아니니 집에서 물이나 우유를 많이 드시라는 조언도 함께.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다 마신 생수병을 버리기 아까웠던 엄마는 그곳에 리필형 세제를 사다가 부어서 넣어두셨다. 그게 세제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으면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왠지 모르게 그 페트병을 부엌 싱크대 위에 떡하니 올려두시고 출근을 하신 것이다. 생수를 마시고 놓아두기 딱 좋은 장소라 누구나 오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막내가 곱게 물잔에 따라 지현이와 아빠에게 대령한 것이고.
처음엔 엄마한테 길길이 화가 나서 (남은 거품을 마저 뿜으며) 열변을 토하셨다는 아빠는, 의사 선생님이 뭐 죽을 정도는 아니라 하시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걸어다니는 비누방울맨이 된 상황도 좀 웃기시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시시닥거리며 자학 농담 따먹기도 하셨다고 한다. 엄마가 아빠 앞으로 생명보험 들어놓은 거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둥.
사실 이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예견된 재난이었다고나 할까.
빈 병만 보면 아깝다고 버리질 못하시는 엄마의 고질적인 습성 탓에 이미 냉장고엔 엄마만이 내용물을 알고 있는 투명 페트병들이 가득했고(매실차 옆에 헛개차 옆에 김 빠진 콜라 옆에 버섯 끓인 물 옆에……), 심지어 최근에는 빈 병의 습격이 그 세를 늘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엔 막내가 샤워를 하는데 바디워시에서 거품이 너무 안 나더라는 것이다. 냄새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덜 문질렀나? 하며 그냥 대수롭잖게 열심히 빡빡 닦았단다. 알고 보니 바디워시 통에 들어있던 액체의 정체는 희석된 락스였다. 착하지만 후각이 약간 모자란 친구다. 하긴 나 역시 샴푸 통에 담겨 있었던 우리 반려견 해피의 샴푸로 머리를 감는 바람에 하루종일 내가 해피인지 해피가 나인지 알 수 없는 호접지몽의 경지를 맛봤으니 막내를 비웃을 계제는 아니긴 하지만.
다행히 걸어다니는 비누방울맨 사건 이후 엄마는 자발적으로 빈 병에 이름표를 붙이시기 시작하셨다(빈 병을 버리실 생각은 없으신 것 같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투명한 액체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 엄마 생신 때는 선물로 라벨지를 사다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