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서 그래 VS 지쳐서 그래
매일 밤 10시, 가족의 시간이 시작된다.
나는 평생 새벽 6시에 일어나는 삶을 살았다. 뭔가 일이 있을 때는 5시 30분 또는 6시 30분으로 시간이 조금 앞당겨지거나 뒤로 늦어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회귀하는 것처럼 다시 또 기상 시간은 6시가 되었다. 그런 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나서, 생애 첫 오후 근무를 하게 되었다. 오후 근무라고 해서 느지막이 9시쯤 일어난다거나 그럴 수는 없지만 어쨌든 여유로운 아침을 1년째 즐기고 있다. 아주 좋다.
고3 엄마와 아빠의 아침은 6시 20분에 시작된다. 대부분 남편이 먼저 일어나서 주방 옆에 있는 내 방 문을 닫아준 후 제육을 볶는다. 그렇다. 대부분 제육이다. 야채도 잘 넣지 않고 양파를 토핑 수준으로 넣는 제육. 그리고 자기 입맛에 맞게 곰탕이나 미역국 같은 국을 끓여준다. 끓이거나 볶기만 하는 밀키트가 항상 냉장고에 쌓여 있다. 하지만 언제나 남편의 선택을 받는 것은 제육이다. 내가 만약 일주일쯤 집을 비운다면, 아마 이 부자는 일주일 내내 제육을 먹을지도 모른다. 남자아이들의 제육사랑이란 내 상상 이상이었다.
아이를 6시 40분부터 깨운다. 그럼 보통은 10분쯤 걸린다. 적어도 7시에는 밥을 먹어야 지각을 하지 않는데. 남편과 나는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아이를 깨우는 게 더 힘들다. 도통 일어나지를 않는다. 대답은 아주 잘하는데. 그리고 아이는 눈도 뜨지 않고 밥과 제육을 먹는다. 눈도 뜨지 않고 제육을 먹는 아이 옆에서 나는 커피 한 잔을 하며 잠을 깨고 남편은 달리러 나간다.
매우 길고 아주 짧은 각자의 하루가 지나간다.
그러고 나면 밤 10시 30분에 아이와 남편이 함께 집에 돌아온다. 남편은 그 시간에 밥을 먹을 때도 있고 맥주를 한 잔 할 때도 있고 버석버석한 얼굴로 나와 아이의 수다를 방청할 때도 있다. 아이는 요즘 야식을 잘 먹는다. 태어나서 이렇게 야식을 잘 먹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살이 계속 찌고 있지만 그래도 난 참 좋다. 아이와 도란도란 이말저말 하는 이 시간이 아주 좋다.
어느 날은 아이가 진짜 쉴 새 없이 종알 거린다. "도현아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지 말고 생각하는 과정의 말들은 마음의 소리로 처리 좀 해 줄래." 그럼 아이는 이렇게 받는다. "하루종일 말을 못 해서 외로워서 그래." 그럼 나는 바로 수긍한다. "아, 그렇겠다. OK. 계속해." 또 어느 날은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입을 딱 닫아 버린다. "도현아, 왜 그래? 힘들어?" 물으면 아이는 "나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그래." 그럼 건들지 않고 거실로 나온다. 그럼 10분~20분 이내에 아이가 거실로 나온다. 재충전이 된 얼굴이다.
어느 날은 세상 진지한 목소리로 트럼프와 환율과 증시에 대해 논한다. 시드 머니가 어쩌고. 어려운 말을 할 때도 있다. 그럼 나는 매우 기특해 마지않는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맥주를 한 잔 한다. 이런 용어가 아이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세상 신기하다. 물론 아이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들어봤지만 데미안은 뭐냐고 묻고. 그에 앞서 데미안을 디메안으로 읽어서 날 기함하게 한다. 또는 캐시 카우가 월급 루팡이랑 같은 거 아니냐고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어서 나와 남편의 목소리가 동시에 커지게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난 밤 10시 반 이 시간이 너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