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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한리 Chae Hanlee Feb 10. 2024

주는 일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41

주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주고 무엇인가를 받는다.  물건을 주고받거나 마음을 주고받는다.  주고받는 일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이를 통해 삶이 진행되고 세계가 변화하며 형성된다.  그러나 주고받는 일, 특히 주는 일은 잘하기가 참 어렵다. 


주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줄 때 마음속에 가치판단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판단?  행위자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일련의 생각들이 일어난다: “나는 이것을 이 사람에게 주려고 한다.  이것을 나로부터 받는 것은 이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일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주는 행위는 그저 행위일 뿐이고,  좋으냐 나쁘냐의 딱지가  붙을 일이 아니다. 선도 악도 아닌데, 이것이 ‘주는 자’의 편에서 선한 일이라고 여겨지면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주는 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받는 자의 영혼이 정화되어야 하며, 그 정화됨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것도 어떤 만족스러운 방식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예컨대, 받는 자의 표정이나 말에서 “오! 당신의 선행으로 나의 영혼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니 계속 선행을 베푸십시오”라는 ‘갈망’이 뿜어져 나오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소위 ‘선한 베풂’이 적절할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는 순간, 즉 주는 행위의 선한 파동이 ‘받는 자의 영혼에 닿을 수 없다’ (1)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주는 자의 마음에는 ‘오심 (惡心: 불쾌하고 마땅치 않은 심사)이라고 불릴만한 심정적인 변화__주기를 주저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받는 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나(주는 자)는 손을 움츠린다. 이제 곧 낙하하려다가 일단 주저하는 폭포처럼 나는 주기를 주저한다.  이같이 나는 오심(惡心)에 굶주렸노라.” (2) 


선심(善心)이 악심(오심: 惡心)으로 변한 것이다. 즉 주는 자의 마음속에 ‘변덕 (變德)’이 생긴 것이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어 그에게 좋은 일이 되기를 바라던 선한 마음이, 받는 사람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적절한 질과 양과 방법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주는 자의 마음속에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한편, 받은 자가 충분한 감사의 마음을 주었다면, 이번에는 받은 자가 주는 자가 되는 ‘역할 전도(顚倒)’가 일어난다. 그리고 주는 행위의 ‘변덕 사이클’은 다시 시작된다.  자신의 감사표현을 받은 자 (기왕의 주는 자)의 얼굴에도 진지한 감사의 표정이 떠오르기를 받는 자는 고대하는 것이다.  받는 자는 자신의 감사표현이 주는 자에 의해 적절히 받아들여졌음을 충분히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3)



(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23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23

(3)   니체는 타인의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확인해야만 만족하는 마음의 미로(迷路), 즉, 배은망덕이니 인지상정이니 보답이니 하는 ‘작은 사상 (思想)’의 미로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주고받는 행위가 ‘행위’로서 끝나는 ‘위대한 사랑’을 하라고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106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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