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필체로 내려쓴 자전적 시>
<이레이저 헤드>는 시네마의 역사에 기록되는 작품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히 보존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가치는 이미 입증되었다. 비록 컬트 무비라는 특성상 그 난해함과 기괴함은 호불호가 갈릴 요소이지만 소위 말하는 '권위자'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를 영구 보존하겠다는 결심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난해함이 도드라지는 작품의 특성상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멋들어지게 지식을 뽐내며 단평을 적어내고 싶지만 부끄럽게도, 솔직히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단숨에 이해를 하지 못 해 혼란스러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감히 주장하자면 <이레이저 헤드>는 젊은 데이비드 린치의 자전적 영화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이야기하고 싶다. 즉, 주인공 헨리는 데이비드 린치 자신이다. 연출 방식이 기괴하고 초현실주의적이기에 공포스럽게 느껴지지만, 이는 일종의 시적인 비유와 비슷하게 보인다. 하루의 시간을 두고 곱씹어본 결과, 나는 <이레이저 헤드>를 이른바, 거친 필체로 내려쓴 자전적 시로 칭하고 싶다.
라디에이터의 소음이 울리면 헨리는 그 안을 주시하며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 안에서는 주기적으로 작은 공연이 열린다. 소극장이라 칭할 법한 자그마한 공연장 위에 얼굴에 기이한 분장을 한 여성이 다소곳한 자세로 미소를 지으며 올라온다.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여성은 두 손을 모은채 좌우로 조금씩 움직인다. 여성이 움직이는 도중 기이한 물체가 툭하고 공연장 위로 떨어진다. 물체의 정체는 오프닝에서 헨리의 입을 통해 바깥으로 사출되던 정체불명의 이형체이다. 몇 차례 여성은 해당 이형체가 떨어지는 순간 멈칫하고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한다. 처음 이형체를 피해 움직이던 여성은 이윽고 이형체가 거슬린다는 듯 구두로 그것을 짓밟고 짓이긴다. 하얀 액체를 뿜어내며 이형체는 죽어나가는 듯 보이고, 여성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응시한다.
마치 모의고사를 준비하던 10대 시절의 수험생과 같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상징으로서 해석하여 치환해보고자 한다. 해당 이형체는 오프닝에서 헨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며 잠에서 깨어난 침대에서 잠든 메리에게서 뽑아내어 던지는 물체들이다. 이를 감독이 현실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고민들로 치환해보면 얼핏 해석이 된다. 또한 라디에이터의 여성은 시네마로 치환해보면 장면을 묘사한 장면이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젊은 린치는 이른 결혼과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 현실적인 고민들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며 그 고민들을 해소해주는 존재로 영화로 생각했다고 해석된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현실의 고민들은 잠시 잊혀졌을 것이며, 그런 이형체로 상징된 고민이라는 존재를 짓밟아 없애는 고마움을 다소 기괴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레이저 헤드>는 어떠한 플롯을 가졌다기보다는 연속된 상징을 시퀀스로 촬영하여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라는 것을 하나의 문학과 비슷한 류로 생각해본다면 <이레이저 헤드>는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워보인다. 그 중에서도 마치 윤동주의 <자화상>과 비슷한 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시'로 보인다. 다만 젊은 날의 데이비드 린치는 현실적인 고민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기에 다소 거칠고 난해한 방식으로 이를 표현해낸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입으로 '<이레이저 헤드>는 나의 가장 영적인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야기 이상으로 더 영적인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을까. 90분에 가까운 런닝타임의 막바지에 헨리를 향해 라디에이터의 여인이 다가와 그를 포옹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해오던 그에게 있어 영화가 따스한 위로를 건네준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그를 위로해주던 영화로 인해 구원받았고 영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앞으로도 <이레이저 헤드>는 다양한 해석을 낳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확연한 불호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카메라로 촬영된 젊은 데이비드 린치의 시는 이후에도 영화사에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비록 그의 모든 작품들이 모두 호평받을 작품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제 더이상은 발매되지 않을 그의 필름들을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애써 삼킨다.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