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2006) 이야기

<괴물이 수집한 것은 여성이 아닌 오독한 본능이었을 뿐>

by 조성현

과거 주말 간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의 목록을 죽 둘러보던 중 일전에 보았던 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옛 기억이 떠오른 반가움으로 지인에게 메신저로 이 영화를 볼 것이라 이야기하자 지인은 어느 한 네티즌의 평점과 댓글을 내게 보내왔다. '여성만 골라죽이는 연쇄살인범을 미화하는 영화', 그리고 별점 0.5점. 지인은 자신이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 했기에 잘 모른다며, 이런 평점이 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물어왔다. 이에 나는 대답했다. '그렇게 볼 수는 없는 영화라고 생각해.'


물론 향수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정확히는 주인공 그르누이는 향수를 제조하는 재료를 여성으로 생각하고 관객 또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그르누이가 제조한 '천사의 향수'의 재료가 과연 여성일까라는 의구심으로 영화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애초에 여성은 재료를 담아내는 그릇인 뿐이고 진정한 재료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가정을 해보고자 한다. 나는 '욕망과 사랑'을 향수의 진정한 원재료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그르누이는 냄새에 집착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을 매혹한 냄새의 정체는 알지 못한다.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분야는 후각이지, 지능 혹은 시각이 아니다. 이는 그가 사물을 판단하는 대상을 후각으로서 인지한 후에 눈으로 보고 냄새의 정체는 이것이구나라고 파악하여 머리 속에 저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집착하는 향기를 풍기는 대상을 여성으로 생각하고 그녀들을 살해하여 그 향을 모으는 선택을 한다.


우선 이 점은 분명히 해두자. 그르누이는 천재가 맞다. 그러나 그가 천재라는 것이 그를 미화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니다. 만일 천재성 그 자체가 미화의 대상이라 한다면, 인류 역사상 수많은 이들을 학살의 장으로 밀어넣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도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의 선동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었으므로.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는 그야말로 '악마'라는 칭호가 수여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악한 천재'의 반열에 바로 그르누이를 올릴 수 있겠다.


이 사악한 천재는 당연히 자신의 세상이 옳다고 믿으며 이 틀릴 리가 없다는 맹신은 오독을 이끌어 낸다. 여기에서부터 저 별점을 준 어느 네티즌의 말에 반박하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르누이가 여성만 골라 죽인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하다. 그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극중 그르누이는 단 한번도 남성을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일이 없다. 하지만 만일 그가 동성애자였다면, 향수의 재료는 남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르누이는 젊은 여성만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즉, 그르누이는 욕망의 대상을 자신의 '걸작'을 통해 박제하고자 하는 인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 향수의 마지막 재료가 특정 인물로 고정이 된다는 것 역시 나의 가정을 뒷받침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만일 그저 젊은 여성 그 자체가 향수의 재료라면 한 명에게 그르누이가 집착할 이유는 없다. 특정인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여자의 채취를 기억하고 저 멀리 도망친 여자를 추격하는 그 끔찍한 소유욕은 하나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바로 '사랑'이다. 오해를 막고자 덧붙인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무조건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르누이는 단 한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겪어보지 못 했기에 상대를 그저 자신의 재료로만 오독했으며, 건강하지 못 한 방식으로 그녀를 완전히 소유하고자 한다.


천사의 향수가 그 위력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순간은 바로 영화의 피날레라고 할 수 있는 그르누이가 광장에 처형당하러 올라가는 순간이다. 그르누이가 천사의 향수를 적신 손수건을 관중을 향해 날리고 관중은 황홀경에 취해 광장에서 집단 난교를 하기에 이른다. 천사의 향수가 이른바 '욕망의 농축액'이라고 가정하면 이는 설명이 된다. 그야말로 진한 욕망에 취해버린 관중이 서로를 탐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그르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눈물을 통해 관객은 그르누이가 깨달았음을 파악한다. 그가 만든 것이 '신성한 구원'이 아닌, 그저 타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능을 폭발시키는 '지독한 환각'이었음을 말이다. 그는 향수를 통해 온 세상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신적 권능을 얻었으나, 정작 그가 그토록 갈구했던 '자두 여인'과의 순수한 교감, 즉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진짜 사랑은 영원히 포획할 수 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향수를 완성한 순간, 그의 오독은 가장 화려하게 성공하는 동시에 가장 처참하게 실패한다.


그르누이는 자신이 태어난 불결한 시장 바닥으로 돌아간다. 가장 비천하고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탄생의 순간을, 이제는 향수의 힘을 빌려 '가장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소멸로 덮어쓰려 한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는 이에게조차 사랑을 받지 못 했던 그가 군중에게 뜯어먹히며 사라지는 기괴한 최후를 선택한 까닭은, 단 한번이라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사랑받는 존재로 남고자 한 뒤틀린 방식의 안식이다. 그는 사랑을 향기로 오독했고, 그 오독의 대가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영원한 무취(無臭)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친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가 연쇄살인범을 미화하는가?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살인의 미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운 적 없는 천재적 괴물이 자신의 욕망을 '물질'로 치환하려 했을 때 벌어지는 지독한 신기루를 보여준다. 별점 0.5점을 준 그 네티즌이 본 것은 영화가 비추는 '현상'일 뿐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현상 뒤에 숨겨진 '인간 소외와 오독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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