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는 진영이 만드는 유쾌한 역방향 프로파간다
<조조 래빗>(2019)는 어찌 보면 참으로 운이 나쁜 영화이다. 하필 동시기에 등장한 영화가 <기생충>(2019)과 <조커>(2019)라는 점은 그야말로 감독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위로해주고픈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짐 캐리가 <트루먼 쇼>(1998)에서 대단한 연기를 선보였음에도 수상에 실패했던 바로 그 과거를 떠올리게까지 한다. (여담으로, 당시 짐 캐리가 시상식 자리에서 펼쳐보였던 자학 코미디는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코미디로 내려온다.)
꼬마 조조 베츨러에게는 상상 속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전혀 배경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영화를 접하면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히틀러유겐트 단복을 입은 10살짜리 꼬마아이가 거울을 보고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읊는다거나, 상상 속의 친구인 히틀러와 경례 연습을 하고 신나는 표정으로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영화의 배경이 세계2차대전 당시 막바지인 나치 독일이라는 정보가 없다면, 아이는 해당 대사를 영어로 이야기하기에 상당히 이질적이고 혼란스럽게 느껴질 법 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가 설계한 덫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광기인 나치즘은 어린 아이인 조조에게는 또래 집단과 어울리기 위한 유니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히틀러유겐트로서 당당한 나치의 일원이 되어 히틀러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말하는 조조는 사실, 엘사의 입을 빌어 말하자면 그저 집단에서 소외받고 싶어하지 않는, 자기 신발끈조차 묶지 못하는 평범한 10살짜리 어린 아이일 뿐이다.
이러한 조조의 맹목적 충성심을 영화는 초반에 나치의 영상에 비틀즈의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입힘으로써 드러낸다. 나치즘의 광기와 비인도적 행위들은 독일의 국민들에게 사실 그리 중요치 않다. 그 충성심이란 비틀즈와 같은 록스타에게 마치는 애정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이다. 그들이 나치식 경례를 하며 뻗은 손을 클로즈업하며 흘러나오는 '당신의 손을 잡고 싶어요 (I want to hold your hand)'라는 가사는 그야말로 시대를 반영하는 희극적 요소이며 영화는 이를 통해 비아냥 섞인 웃음을 날린다.
잠시 다른 영화 이야기를 언급하도록 하자.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역시 나치 부역자인 주인공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유대인을 향해 쏟아지는 박해의 부조리함을 조망하는 작품이다. 해당작품은 프레임 내부에 오로지 루돌프 회스라는 독일군 장교의 일상 이야기만 담담하게 담아내며 정작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현실은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그들의 현실을 짐작하게 하는 수단은 까맣게 올라오는 연기와 화면 바깥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단말마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프레임 바깥에 있는 그들을 결코 홀대하지 않는다. 아니, 엄연히 말하면 영화의 주인공은 그들이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이름의 무기를 통해 그들이 겪는 핍박을 관객들에게 강렬히 주입한다. 그리고 그처럼 끔찍한 현실을 관객의 피부에 와닿게 하는 수단은 사운드, 그리고 담백함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유머가 없다. 유머가 틈입하는 순간, 감독의 메시지는 필시 흐려진다. 그리고 유머가 없는 이 공간에는 낭만도 없다.
그렇다면 <조조 래빗>은 어떠한가. <조조 래빗> 역시 유대인이 당하는 박해는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카메라는 그들이 겪는 비참한 현실을 비추어주지 않는다. 유대인 소녀 엘사가 그들을 대표하는 캐릭터이긴 하나, 그녀는 수용소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 조조의 집에 숨어살며 검열을 피하는 존재, 즉, 핍박의 당사자이긴 하나 끔찍한 현장의 목격자는 아니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의 결정적 차이점은 바로 그것이다. <조조 래빗>에는 유머와 낭만이 있다.
꼬마 조조가 엘사를 처음 마주치는 순간을 되돌아보자. 사실 이 장면은 10살짜리 꼬마 아이의 시선에서 보면 공포 그 자체이다.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자 이를 뜯어내고 들어가니 처음보는 여자가 그 안에 숨어있고, 이를 보고 놀라 도망치자 그 여자가 자신을 쫓아와 뒤에서 잡아채고는 신고하면 모두 다 죽게 될 것이라며 협박까지 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겁을 잔뜩 집어먹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분명 엘사를 처음 본 조조는 그녀에게서 도망치려 하지만 엘사는 천천히 내려와 그를 뒤에서 붙잡는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사실 호러스럽다기보다는 어린 동생을 놀아주는 누나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더욱이, '네가 신고를 하면 나 뿐만 아니라 너희 엄마도 죽는다.'라는 엘사의 협박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하는 조조의 모습은 전형적인 그 또래 아이의 순수함, 그리고 심약함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그 후 엘사의 약혼자인양 시늉을 한 어설픈 편지를 썼다가, 이를 엘사에게 읽어주며 골려주고는 바로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는 조조의 모습을 보자. 그야말로 상대에게 유치한 질투를 부리다 이내 죄책감을 느끼는, 나치 당원으로서의 충성심보다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풋풋한 짝사랑에 더 가깝다. 이는 후에 조조의 엄마 로지가 세상은 증오가 아닌 사랑이 지배하는 것이라며 조조의 앞에서 춤을 추는 시퀀스와 연결지어진다. 조조를 지배하던 나치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은 사랑으로서 그 힘을 잃기 시작한다. 조조는 몰랐으나, 이미 사랑의 힘은 그 순간부터 증명되기 시작한다.
결국 조조는 그 사랑의 힘을 알려주던 엄마가 죽임을 당한 것을 목도하는 순간, 처음으로 그의 손으로 누군가의 신발끈을 묶는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엄마의 풀려버린 신발끈을 묶으려 하지만 서툰 탓에 제대로 하지 못 하고 그는 절망한다. 엄마 로지의 신발은 바로 그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춤출 때 신었던 바로 그 신발이다. 마치 결국 증오에 사랑이 패배한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이다. 증오가 사랑을 압살한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 매듭지어지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도는 신발끈은 낭만의 패배를 은유하는 듯하여 관객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결국 조조는 신발끈을 묶어낸다. 그 대상은 이제 자유를 맞이한 엘사다. 상상 속의 아돌프를 창밖으로 걷어찬 조조는 더 이상 나치의 단복 뒤에 숨지 않는다. 광기의 시대는 저물었고,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엘사는 '춤'으로 답한다. 조조의 엄마 로지가 추었던 바로 그 사랑의 몸짓이 마침내 승전보를 울리는 순간이다. 사랑을 믿는 진영이 전파하는 이 유쾌한 역방향 프로파간다는 그 따스한 결말로 영화를 매듭짓는다. 마치 조조가 메었던 신발끈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