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담이라는 아교>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과 어린 왕 단종의 비극적인 운명은 많은 이들에게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안타까운 역사라는 사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하면 수양대군의 반정이 실패하고 단종이 왕의 자리를 지켰다한들, 그가 뛰어난 성군이 되었으리란 보장은 없다. 어린 아이가 왕이 되면 반드시 섭정이 붙거나, 대리청정, 외척 등 외부 세력이 권력을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어린 왕에게 펼쳐지는 길은 크게 둘이다. 이를 제압해내고 정말로 성군으로 거듭나거나, 혹은 안주하여 암군이 되어버리거나.
물론 이러한 역사에 적용되는 진리를 영화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상상력이야말로 영화를 진행시키는 거대한 동력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시선만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비정한 시선일지 모른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2026)는 만약이라는 미완의 파트를 단종이 성군의 기질을 가졌다는 가정으로 영화를 전개한다. 특히나, 영화의 초반부 촌장 엄흥도(유해진)를 사지로 몰아넣는 산군(山君), 범(호랑이)을 통해 이러한 단종(박지훈)의 타고난 기개를 증명하는 장면은 감독의 단종을 향한 안쓰러움 섞인 시선이 드러난다.
영화 초반, 엄흥도를 쫓아 절벽으로 굴러떨어지게 한 범은 영화의 중반부, 엄흥도가 단종을 찾아 절벽으로 뛰쳐나간 시퀀스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범은 마을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군림하여 왔으며 엄흥도의 아들, 태산이 위기에 처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범에게 화살을 날린다. 화살을 맞은 범은 노하여 태산을 잡아먹으려 하고 여타 영화에서 그러하듯, 태산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단종은 기함을 하며 범을 노려보고 그를 향해 꾸짖고 활을 쏘아 범을 잡아낸다. 산군을 잡는 왕의 기개를 펼쳐보이는 순간이다.
영화의 짜임새, 혹은 고증이 훌륭하다 하면 그것은 아니다. 또한, 이 산군, 즉 범이 등장하는 장면에서의 CG는 솔직히 말하건대, 그리 훌륭하진 못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요즘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AI 기술을 적극 도입했구나라는 정도의 생각만 들 뿐, 현실의 호랑이의 모습과는 엄연히 괴리감이 있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조악한 CG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범의 미간에 단종의 화살을 꽂아 넣은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현실의 역사에서 끝내 발휘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던 '왕의 권위'를 영화라는 가상 세계에서나마 복권해주고 싶은 지독한 연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완벽하지 않다. 어찌본다면 조악한 CG의 문제, 그리고 진부한 인본주의의 문제와 지나친 역사적 가정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나 영화의 이러한 벌어진 틈들을 조여주고 연민어린 시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이 있다. 그것이 바로 '만담'이다.
영화는 진행되는 내내, 수없이 많은 만담을 틈틈히 장면 하나하나마다 조각해넣는다. 이 만담들이 물론 모두 만루 홈런을 쳐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극이 전개가 되는 중,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과 서사를 부여하는 훌륭한 아교 역할을 함은 부정할 수 없다. 만담은 그저 텅 빈 웃음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거창한 명분에 함몰되어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역사의 비정함에 대항하는 가장 낮은 자들의 저항이다. 유배지 영월의 적막을 깨는 촌로들의 실없는 농담과 그 틈바구니에서 처음으로 아이처럼 소리 내 웃는 단종의 모습은, 우리가 그토록 고대했던 '성군'의 자취보다 더 실존적인 인간의 온기를 느끼게 한다. 감독은 조악한 범의 미간에 화살을 꽂아 왕의 권위를 세워준 뒤, 이 따뜻한 만담을 통해 그 권위 너머에 숨 쉬고 있던 소년의 일상을 복원해낸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단종이 성군이 되었을지, 혹은 암군이 되었을지는 그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만담이라는 아교를 통해 역사라는 딱딱한 껍데기 아래 숨겨진 평범한 행복의 가능성을 끈적하게 붙여놓는다. 비록 그것이 찰나의 환상일지라도, 관객은 그 허구의 만담 속에서 비로소 단종의 비극을 견뎌낼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 속의 조각을 이어붙여 만든 한편의 영상화된 서사를 두고, 우리는 '영화'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