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내려 할 수록 팽팽해지는 핏줄의 장력
보통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듣는 이들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2002)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재는 박찬욱의 영화가 아니다. 동명의 영화이자, 박찬욱 본인이 밝힌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을 가져와 채택했노라고 밝힌 1979년작, <복수는 나의 것>이 바로 그 주제이다. 사실 해당 제목은 성경의 구절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그 도입부부터 에노키즈가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극을 시작해나가며, 그가 독실한 카톨릭 집안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신으로부터 그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인물임에도 신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읊조리는 아이러니를 여러차례 비춰준다.
영화는 에노키즈 이와오의 최후를 예견하는 시퀀스로 시작한다. 하지만, 정확히 관객은 에노키즈가 무엇으로 그 최후를 맞닥뜨려야 하는지를 내러티브의 진행을 통해 관람한다. 그런 면모에서 보자면, 관객은 다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수 있겠다. 연행되는 와중에 짐짓 태연자약하게 찬송가를 읊조리며 자신의 최후를 평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인물로 보이던 에노키즈는 그야말로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는 흉악 범죄를 일삼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는 일말의 죄책감도, 후회도 보이지 않는다. 제목만으로는, 그리고 도입부만으로는 마치 어떠한 억울한 일을 당한 인물이 피의 복수를 한 뒤 담담하게 법의 심판을 받는듯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에노키즈는 그런 복수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에노키즈의 범법 행위에 희생당하는 이들은 말 그대로 '무고한' 이들이다. 게다가 그는 범죄에 있어 아마추어적인 모습마저 보인다. 수사망이 좁혀오는 와중에서 그가 보이는 일련의 행태는 그야말로 증거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수준이다. 대표적으로 영화의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첫 살인 후,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소변으로 닦아내는 장면을 보자. 소변은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는 기능만 할 뿐, 오히려 해당 행위는 현장에 생물학적 증거를 흩뿌리는 짓이다. 즉, 에노키즈의 범죄는 동물적인 배설에 가까울 뿐, 결코 지능적거나 목적지향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은 의문을 품는다. 에노키즈는 어째서 저렇게 폭주하는가. 그리고 그가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자는 대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극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에노키즈의 아버지가 에노키즈와 부자의 연을 끊으며 하는 말이 바로 그 답이다. '네가 해할 수 있는 건,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이들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침을 얼굴에 맞은 에노키즈는 분노를 머금은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죽이고 싶어.' 그러나 에노키즈는 아버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 한다. 이로써 관객은 유추가 가능하다. 에노키즈가 복수하고픈 대상은 그의 아버지였으며, 그의 정체성은 얼핏 보기에는 고삐풀린 채 날뛰는 망아지이나, 실질적으로는 복수의 대상에게는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하는 '겁쟁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도망자, 그리고 겁쟁이의 피는 바로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로부터 이어 내려온다. 둘은 그저 도망치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에노키즈는 경찰의 수사망으로부터 도망하고, 아버지는 며느리의 연정으로부터 도망친다. 즉, 에노키즈가 그토록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는 까닭은 그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싶었으나, 닮을 수 밖에 없는 굴레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국주의 일본에게 굴복하는 아버지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저항했던 에노키즈는, 이미 궤도를 이탈한 순간에 죽어버렸고 그 아비의 피에 깃든 도망자의 망령만이 남았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이 에노키즈 가의 아버지와 아들 모두 끝끝내 낙원에 도달하지 못 한다. 그럴 운명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며느리를 품지 못 하고, 아들은 도망자로 지내다가 자신을 도와준 여인을 교살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어쩌면 아들은 자신에게 이러한 굴레를 안겨준 아비에 대한 증오심으로 피가 끓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인의 시선에서는 독실한 신도인 아버지와 범법자 아들이라는 그야말로 '호부견자'라는 사자성어에 어울릴 가문의 비극일 지 모르나, 이 핏줄에 심어진 본능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저 '콩 심은 곳에 콩난' 일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실 에노키즈의 범죄 행각에 대해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도망자의 숙명을 가진 이가 그저 도주의 명분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런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그의 행각이 설명이 된다. 그는 그저 도주하기 위해 사기를 치고, 여성을 유혹하고,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이를 살해한다. 무고한 이를 살해한 부도덕한 파렴치한으로 낙인이 찍혀 계속된 도망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그의 정체성이다.
군국주의 일본으로부터 재산을 빼앗긴 채 도주했던 아버지를 보고 반항심을 품은 에노키즈 이와오는 그 떠나가는 배 위에서 튜브를 바다로 던지며 나는 그 범주를 벗어나겠노라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구명을 위한 튜브는 물에 빠진 이를 끌어당기기 위해 반드시 끈이 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노키즈 역시, 그 핏줄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재차 끌려들어간다. 결국 에노키즈가 그토록 격렬하게 휘둘렀던 살의와 도주의 행적은, 아비라는 거대한 본체로부터 멀어지려 할수록 더욱 팽팽하게 조여오는 그 운명의 끈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허공을 향해 던져진 에노키즈의 유해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머무는 엔딩 시퀀스는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도주를 위한 삶에 구해지는 구원은 없고, 그 자가 도달할 수 있는 낙원은 없다. 에노키즈가 끊어내고자 했던 핏줄의 인력이 작용하여 그야말로 신의 손아귀에 들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 선언한 신의 심판은 그렇게, 증오하던 아비의 굴레 속에서 영원히 멈춰버린 아들의 모습으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