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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 장평

<뿌리가 잘린 나무는 시들어가지만,>

by 조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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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국을 믿습니다. (I believe in America)”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의 시작을 알리는 보나세라의 이 첫마디는 아메리칸 드림의 개념을 응축한 문장이다. 그러나 정작 이 대사는 미국의 이상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 찬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상이 무너졌음을 털어놓는 씁쓸한 고백이다. 보나세라는 그가 믿던 경찰과 법이라는 사회 정의의 상징이 그를 배반하였기에, 마피아 보스 비토 콜레오네에게 자신의 딸을 폭행한 남성들을 응징해달라며 도움을 청한다. 그의 대사는 그가 그토록 신뢰하던, 법과 정의가 무너져 내린 국가 체계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라는 용어는 1931년, 역사가 제임스 트러슬로우 애덤스가 자신의 저서 <미국의 서사시>에 처음 명시적으로 제안한 개념이다. 그는 이를 ‘모든 이가 능력과 성취에 따라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정의하며, 이를 미국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국가 비전으로 제시했다. 이 꿈은 건국 초기부터 미국 사회의 중요한 이념으로 작동하며,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을 새로운 대륙으로 이끌었다. 특히 서부개척 시대, 많은 이들은 사금 채굴과 농경지를 찾아 미지의 땅으로 향했고, 이는 ‘노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믿음을 구체적인 역사 속 장면으로 만들어냈다. 아메리칸 드림은 이처럼 개인의 부단한 노력이 공동체의 발전과 맞물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랫동안 자리해 왔다.


노력과 재능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약속이 많은 창작물에서 중요한 가치로 다뤄지고 있다. 소설 <대부> 외에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혹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등의 작품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써 내려간 예이다. 이 원초적인 능력주의(Meritocracy)는 보나세라와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약속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건국된 이래, 그 약속은 수많은 이민자와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반복됐고, 예술은 그 믿음과 배반을 끊임없이 다뤄왔다.


그리고 이 약속을 소재로 한 창작물로는 시네마 또한 예외가 아니다. 위에 언급한 <대부>, <분노의 포도>, <위대한 개츠비>는 모두 동명의 영화가 존재한다. 영화는 다양한 시선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고찰한다. 빈곤한 이가 좌절을 딛고 일어나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일종의 예찬론이 존재하기도 하며, 그 안에서 현실의 벽에 부딪혀 몰락하는 처연한 일생을 다루기도 한다. 또한, <대부>와 같이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의 성공담(비토 콜레오네)과 성공을 향해 달린 이가 마주하게 되는 고독(마이클 콜레오네)이라는 양가적 속성을 동시에 다룬 작품 역시 존재한다.


<브루탈리스트>는 그 유서 깊은 신념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15분의 인터미션을 기점으로 1부와 2부로 나뉜 구성을 가진다. 1부에서는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 扮)라는 이름의 이민자가 전쟁을 피해 온 낯선 땅 미국에서 새로이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이며, 상승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의 이상을 조명한다. 반면, 2부는 라즐로 토스가 결국 자신의 잘린 뿌리에 남겨진 상흔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리막을 걷는 서사를 담는다. 이는 ‘아메리칸 딜루전(American Delusion)’이라 불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조명한다.


그러한 점에서 <브루탈리스트>는 <대부>와 맞닿아있는 면이 있다. 라즐로 토스라는 인물이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것은, 돈 치치의 살해 위협을 피해 미국이라는 땅으로 건너온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 扮)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진다. 그리고 라즐로는 그의 건축에 대한 감각으로, 비토는 특유의 냉철함과 리더십으로 사회적 성공에 가까이 다가선다. 반면, 인터미션의 이후 펼쳐지는 2부의 이야기는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 扮)를 연상시킨다. 마이클은 아버지를 닮은 냉철함으로 패밀리의 수장이 되지만, 그 비정함이 가족들과의 장벽이 되고 결국 그토록 사랑하는 딸을 잃고 은둔하게 된다. 라즐로의 몰락은 그 마이클의 절규와 오버랩된다.


영화의 제목 <브루탈리스트>는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양식으로 구조물을 축조하는 철학을 가지는 이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브루탈리즘은 거칠고 투박한 콘크리트 외관을 그대로 노출하는 양식으로, 인간적인 온기나 장식을 배제한 채 구조의 본질과 재료 자체를 드러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미국 버팔로 시의 지방법원 청사 등이 이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이러한 양식은 인간적인 따스함보다는 거칠고 냉정한 인상을 주며, 영화는 이처럼 노출된 질감의 세계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을 응시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조망하는 영화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한 서민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시련을 딛고 능력으로 성공을 한다는 전통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가치를 예찬하는 영화, 그리고 그 안에서 희생되는 약자들을 조명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그늘에 카메라를 초점을 맞추는 영화들이다. 그렇다면 이 양가적 속성을 다룬 <브루탈리스트>는 과연 어떠한 결말에 다다르고 있는가. 1부의 상승은 아메리칸 드림의 예찬론에 해당하는 영화와 결부시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실재함을 주장한다는 시선을 바라보고자 한다. 또한, 2부의 하강을 다루며 그 실존하는 성공 이면에 암약하는 그림자들을 논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이상과 허상의 결합이 다다르는 결말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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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한 여인이 군인들에게 끌려와 심문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치의 침공으로 인해 쫓기는 신세가 된 유태인, 라즐로 토스의 가족은 도망치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라즐로는 홀로 미국으로 향한다. 어둠과 불안이 뒤엉킨 이 시퀀스는 라즐로가 그가 몸을 실은 선박의 문을 열고 나서야 반전된다. 문 너머로 환한 햇빛과 동시에 스피커에 터져 나오는 사운드는 그가 마침내 도달한 새로운 땅, ‘기회의 땅’ 미국의 희망과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순간 카메라는 거꾸로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을 향해 그 시선을 옮긴다. 마치 이 자유의 땅에서 그의 삶에도 수많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듯.


라즐로가 사촌 아틸라를 만나러 오는 길, 카메라는 그가 탑승한 버스가 운행하는 시선을 따라 비춰준다. 그러나 카메라의 구도가 보편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운행하는 차량의 시선을 따라가는 시퀀스의 경우, 운전자 혹은 탑승자들의 시선에 맞추어 시야를 설정한다. 그러나 <브루탈리스트>는 매우 낮은 시야로 카메라를 놓아 거의 도로에 밀착하다시피 한다. 이는 마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지면을 통과해 그 아래에 서식하는 생명을 포착할 때 사용하는 카메라 워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마치 라즐로가 뿌리내리지 못한 존재임을 암시하듯, 땅 아래로는 침투하지 못한 채 그 위를 스칠 뿐이다.


‘뿌리’는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적인 단어이다. 나치의 침공으로 인해 자신의 조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도착한 유대인 라즐로는 뿌리가 잘린 채 새로운 땅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 유명 잡지에 그의 건축물 사진들이 담기고, 아틸라에게는 ‘마에스트로’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이지만 미국에서는 일개 난민이요, 이방인일 뿐이다. 그가 이룩했던 성과는 홀로코스트와 함께 부정당했으며 삶의 원동력인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큰 상처를 입은 그에게 미국은, 이 척박한 땅에 새로이 뿌리를 내리라는 혹독한 과제를 내린다.


한편, <대부>의 보나세라가 드러내는 아메리칸 드림의 부정적 실체와는 달리, 이 꿈을 온전히 성취한 인물을 조명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록키>다. 생각해보면,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텔론 扮)는 이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되기에 모든 적합한 조건을 지닌 인물이다. 밑바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프로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는 인물이며, 주변인에게 아까운 재능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비록 사채업자의 수금원이라는 불온한 일을 하더라도, 그는 끝내 양심 선을 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 스스로 '난 밑바닥에서 수없이 많은 싸움을 했지만, 내 코는 단 한 번도 부러지지 않았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를 지목한 크리드조차 예상하지 못한 잠재력이 그에게 내재하여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영화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록키의 탄생 배경 역시 흥미롭다. 수많은 영화사들이 시나리오 판권을 원했으나, 실베스터 스텔론은 그 자신이 주연을 맡아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고 이는 제작을 지연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당시 제작사들은 알 파치노와 같은 유명배우를 록키의 역으로 캐스팅하기를 원했으나, 오히려 그것은 <록키>의 가치를 희석시켰을 것이다. 무명의 권투 선수가 자신에게 온 기회를 잡아 단숨에 슈퍼스타로 떠오른다는 이야기는 무명의 배우 실버스터 스텔론이 유명배우로 발돋움하게 된다는 메타 영화적인 시선에서 정확히 겹쳐진다. 말하자면, 영화는 그가 주연을 맡음으로 인해서 완성된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록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라즐로 역시 록키와 마찬가지로 선량한 마음을 가진 재능있는 인물이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같이 무료급식소 앞에 줄을 서 있던 흑인 노동자 고든(이삭 드 번콜 扮)의 아이를 보고 자신의 몫을 양보하는 인물이다. 고향을 잃고 떠나온 인물이니만큼 형편은 당연 넉넉하지 않으나, 한 때 고국에서 인정받던 유명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사촌 아틸라의 가구점에 얹혀살며 새로운 일을 진행하는 도중, 해리 리 밴 뷰런(조 앨윈 扮)이라는 인물이 가구점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제안한다. 그를 따라 아버지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 扮)의 별장으로 향하는 도중, 두 집단 사이의 신분적 간극은 고급 자동차와 낡은 자동차라는 시각적 대비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기득권의 존재는 노력과 재능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순수하게 실현을 불가하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사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가치의 원칙에 비춰보자면 라즐로에게 록키와 같은 성공은 반드시 따라와야만 한다. 하지만 기존의 대부호인 밴 뷰런 일가의 값비싸고 성능이 좋은 자동차에 비해 라즐로 일행의 자동차는 이를 따라가지 못해 애를 먹는 모습을 보인다. 실질적으로 미국 위에 성공한 이들과 라즐로와 같은 이민자들 사이에는 그 자동차 간의 거리만큼이나 거대한 간극이 존재함을 이 장면은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간극은 기존 기득권의 필요가 있을 때에야 조금이나마 좁혀진다. <록키> 역시 방송가 고위층의 궁여지책으로 인해 그의 존재가 필요했으므로 사건이 진행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라즐로에게 주어지는 기회 역시 해리슨 리 밴 뷰런의 필요로 인해 발생한다. 실제로 해리슨 리 밴 뷰런은 라즐로가 진행한 서재의 공사에 분노하고 그에게 시련을 안겨주지만, 이후 그의 서재가 유명세를 타자 라즐로를 찾아와 사과를 건넨다. 그리고 그 사과는 전적으로 자신의 프로젝트에 라즐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행해진다.


그렇기에 관객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사과는 단순하고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리슨은 라즐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재의 공사에 대해 묻기를 시도하기보다 다짜고짜 역정을 내며 감정을 표출할 정도로, 건축과 예술에 대한 미적 감수성이나 철학적 이해가 거의 전무한 인물로 그려진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감각을 진심으로 소유한 사람처럼 행동하려 애쓰지만, 실상은 그저 허영과 모방의 태도에 머무는 인물일 뿐이다. 그런 사람이 내미는 사과는 아무리 형식적으로 진지해 보일지라도, 순수하게 유쾌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불쾌하고도 불편한 여운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라즐로라는 인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리슨이 자신과 가족이 새로운 땅에서 다시 삶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한 인물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는 어느 정도의 복잡한 감정과 함께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오버랩되는 것은 <록키>에서 방송사 고위 관계자가 록키를 불러 설득하기 위해 꺼내 들었던 단어, ‘기회의 땅(Land of Opportunity)’이다. 비록 이 단어는 록키를 이용하기 위해 꺼내든 일종의 불온한 핑계였으나, 이 단어만큼이나 아메리칸 드림의 정신을 응축한 단어는 찾기 어렵다. 라즐로 역시 해리슨의 필요로 인해 록키와 마찬가지로 기회를 잡게 된다. 해리슨은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거대한 커뮤니티 센터를 건축하는 프로젝트의 총책으로 라즐로를 임명한다.


비록 해리슨의 필요로 인해 주어진 기회였지만, 라즐로에게 나쁜 소식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그는 해리슨의 도움으로 헤어졌던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에 성공한다. 라즐로 토스라는 이름의 한 그루의 나무는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땅에 자리를 잡고 가지를 뻗어 나가려 한다. 적어도 그가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는 순간까지, 몇 차례의 강풍이 불고 메마른 땅에서 고생하였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가 아내와 조카를 만나는 순간까지는 그의 재능으로 일구어낸 절반의 성공신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절반의 성공은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해리슨의 뒤늦은 태도 변화는 감화나 이해의 결과가 아니다. 그의 재능은 어디까지나 해리슨이 필요로 하기에 호출되었고, 수요가 사라지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조건적 인정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록키>에서 크리드 측이 흥행을 위해 무명의 선수에게 준 기회와도 닮아있다.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미국에서조차, 진입의 자격은 노력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진입은 기득권이 발부하는 통행증을 요구한다. 라즐로가 마침내 얻은 그 절반의 성공의 실체는 타인의 필요에 의존한다.


이 다소 불안정하게 부여된 작은 성공은 라즐로의 가족이 재회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르제벳은 고난의 영향으로 휠체어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어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짓는 라즐로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의구심을 느낀다. 이 불안정한 성공의 기반을 딛고 과연 이 뿌리가 잘려나간 나무는 큰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영화는 라즐로의 가족사진을 은막 위에 비춰주며 인터미션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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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분의 런닝타임 중 15분을 차지하는 인터미션이 지나가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라즐로의 하강의 국면을 관객에게 선사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폭력이 휩쓸고 다녀간 곳은 라즐로의 조국 하나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 에르제벳은 후유증으로 심각한 골다공증에 시달린다. 전쟁의 상흔은 그곳을 떠나온 이들의 육체에도 새겨진다. 그 날카로운 칼날은 땅과 인간, 그리고 그들의 뿌리를 할퀴며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그 전쟁이 남긴 흔적으로 인해 에르제벳은 매일 밤 고통에 시달리며 비명을 지르고 라즐로는 비애를 삼킨 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


에르제벳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며 2부의 시작을 알리는 카메라는 본격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낙관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메리칸 드림이란 본래 선량하고 성실하며 능력 있는 개인이라면 누구나 결국에는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거대한 신념이자 사회적 약속이다. 그러나 라즐로가 마주한 현실은 그 달콤한 약속과는 전혀 딴판이다. 그가 마주한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보다는 착취와 배제, 냉소가 교차하는 모순의 공간이며, 그 속에서 라즐로가 믿고 의지했던 모든 약속들은 차례로 붕괴되고 만다. 그것은 더는 꿈이 아니라, 현실과 단절된 자기 기만, 즉 ‘아메리칸 딜루전(American Delusion)’일 뿐이다.


이 허상의 씨앗은 이미 1부에서 심어진 상태이다. 거처를 잃고 헤매며 석탄을 캐는 노동자로 일하던 라즐로는 그가 이 낯선 땅에서 새로이 만난 친구 고든과 함께 고된 현실을 잊기 위해 여러 차례 약물에 의지했음이 드러난다. 후에 둘의 대화를 통해 고든은 이를 끊었음을 보여주지만, 라즐로는 이를 결코 끊어내지 못했음이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이 허상의 씨앗은 라즐로의 내면을 갉아먹으며 조금씩 싹을 틔운다. 그 싹은 외부의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라즐로의 삶 전체를 서서히 잠식하며 깊고 잔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라즐로라는 강제로 파낸 나무는 심어진 새 땅에서 새로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나가려 하나, 그 몸에는 이미 기생하는 씨앗이 심어진 셈이다. 이 기생 식물이 자라나 라즐로의 삶을 갉아먹을 것은 사실상 불 보듯 뻔한 미래이다. 이미 쳇 베이커 등 수없이 많은 예술가가 이 악랄한 유혹에 빠져 삶이 수렁에 빠진 예가 많다. 그러나 이 끔찍한 유혹을 찾기까지는 살을 에는 고통이 필연적이다. 즉, 누군가 그의 살을 강제로 째고 그 안에 씨앗을 심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 씨앗을 심은 이는 누구인가. 그저 라즐로 개인이 충동적이며 유혹에 약한 인간이기 때문인가. 한 편의 다른 영화를 들여다보며 그 주체가 누구인지 찾아보고자 한다.


<행복을 찾아서>(2006)는 영화의 시놉시스만 읽는다면, 한 흑인 남성이 한 회사에 인턴으로 취업해 가난을 이겨내고 최종적으로는 성공한다는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 예찬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영화의 120분의 런닝타임 중 그가 성공하는 부분을 다루는 시퀀스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성공은 종국에, 그가 정직원으로 채용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로 나서는 씬 이후 페이드 아웃과 함께 텍스트로 짧게 처리해버리는 것이 고작이다.


영화는 한 남성의 감동 서사를 이야기하는 듯하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행복을 찾아서>라는 원어 제목은 ‘Pursuit of Happyness’다. 의도적인 오타를 정상적으로 고친 뒤, 이를 본래의 뜻으로 번역하면 ‘행복 추구권’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 제목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감독이 의도한 바는 실제로는 가난으로 인해 침해당하는 한 인간의 기본권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으로 보는 것이 적확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행복 추구권’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언급되는 내용이다. 즉, 미국이라는 국가가 건설되는 데 있어 기본 원칙으로 명백히 적시된 국민의 권리이다. 아메리칸 딜루전은 이러한 미국의 기본적인 정신, 원칙이 현실 속 부조리로 인해 쉽사리 손상되어버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 扮)는 그 성공을 거머쥐기 위해 의료기기를 판매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 6개월의 인턴 생활을 궁핍 속에 버틴다. 그 과정에서 가족은 해체되고 거처에서 쫓겨나기까지 한다.


이 모습은 <브루탈리스트>의 라즐로의 모습과 상당 부분 오버랩된다. 크리스 가드너와 라즐로 모두 가난과 결핍과 투쟁하는 선량하지만 능력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 아메리칸 드림의 원칙에 부합하는 캐릭터들에게 가해지는 시련은 미국 건립의 초석으로 존재하는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는 방향이다. 인간의 행복에 있어 거처와 식량은 기초적으로 요구되는 사항들이지만 두 인물 모두 그 두 가지가 충족되지 못한 환경에 처해있다. 라즐로는 사촌 아틸라의 거처에서 그의 아내 오드리의 모함으로 인해 쫓겨나며, 가드너는 월세를 제때 납입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길거리로 내몰린다.


미국의 사회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이에게 권리를 빼앗는 것을 너무나 쉽게, 그리고 당연한 듯이 여긴다. 가난은 불성실하게 여겨지며, 숱한 발버둥 후에도 상승하지 못한 이들의 불행에는 ‘노력의 부족’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전가한다. 그 안에서 원칙은 허울 좋은 수사일 뿐, 반드시 지켜지는 사항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상승을 약속하며 사람들에게 기대를 부추기지만, 상승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각종 장애물과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냉랭하다. 그 무관심은 구조적이며 또 반복적이다. 라즐로와 가드너와 같은 이들은 그 시스템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입으며 그 ‘약속된 미래’라는 허상을 실감한다.


브루스 알렉산더 박사는 1970년대, 마약의 중독성과 환경 사이의 인과관계 증명을 위해 두 개의 케이지를 준비한다. 한 곳은 물과 먹이, 그리고 안락한 환경이 갖추어진 그야말로 ‘쥐들의 낙원’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비좁고 삭막한 공간이다. 그리고 두 개의 공간에 각각 모르핀을 섞은 물을 용기에 담아 내려놓는다. 그리고 실험실의 쥐들을 각각 두 공간으로 나누어 배치한다. 브루노 알렉산더 박사는 이 샘플을 구비한 뒤, 각기 다른 두 환경을 관찰한 결과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반적 상식과는 판이하 결과를 도출한다. 관찰의 결과, 비좁고 불편한 환경에 처한 쥐들은 일제히 모르핀을 섭취하고 약물에 취하기 시작했으며, 안락한 환경의 쥐들은 이 약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실험은 당대의 일반적인 사회 상념과는 다른 데이터를 제공한다. 이 ‘쥐 공원’ 실험은 마약의 중독성은 실질적으로 그가 처해있는 환경과 정서적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러한 점에서 갖은 상실이 라즐로의 마약을 갈구하는 성정으로 작용한다고 해석될 여지를 제공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험난한 환경에 강제로 밀어 넣어진 쥐들처럼 라즐로 역시 자신의 손으로 이 땅 위에 새로이 자신의 터를 일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약은 그를 잠시 편안하게 만드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이는 그저 도피일 뿐, 결코 구원되지 못한다. 게다가, 중독성이라는 위험까지 내포하기에 이 도피는 필연적으로 파괴적이다.


즉, 라즐로 토스라는 나무에 기생하는 씨앗을 심은 이는 미국이라는 토양 그 자체이다. 구조적인 무관심과 착취, 냉소로 구성된 체계는 그 가난한 이민자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쾌락으로 내몬다. 출중한 능력의 건축가는 이 냉담함 속에서 끝까지 버티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하고자 하나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시스템의 힐난과 질식할 듯한 압박이다.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아메리칸 드림은 ‘피나는 노력’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이 문은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실체조차 없는 ‘신기루’다. 이를 향해 달려가던 이들은 결국 그 문에 닿기도 전에 탈진하여 쓰러지고, 그 쓰러진 이들을 향해 사회는 차가운 시선만을 던진다.


라즐로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다고 취급할 수는 없다. 그는 그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리슨이 주최하는 프로젝트의 총괄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별개로 프로젝트는 중대한 난관에 부딪힌다. 해리슨이 운영하는 회사의 기관차가 사고로 인해 전복되고 이제 프로젝트는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다. 라즐로는 해리슨에게 공사가 중단되어선 안 됨을 강하게 주장하나, 해리슨은 그의 의견을 매몰차게 묵살한다. 그렇게 라즐로는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절망하고 에르제벳은 그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나 그를 수렁에서 구해내기는 역부족이다. 그렇게 라즐로의 위엔 어둠만 드리운 채 한참의 시간이 지난다.


미국은 정작 아메리칸 드림의 원칙을 믿고 그 능력주의적 신념을 가진 라즐로의 줄기에 균열을 내고 ‘마약’이라는 파괴적 씨앗을 심는다. 라즐로는 자신의 기술과 성실함, 그리고 건축이라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 했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이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는 점점 그 신념이 현실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를 목격한다. 해리슨의 허가로 얻어냈던 불안정한 절반의 성공은 공사가 중단됨으로 인해 그에게 거대한 절망만을 안긴다. 언제 그 끝을 고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기나긴 고난을 마주하게 된 라즐로에게 자기파괴적 회피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은 가혹하다. 정확히 말해, 그것만이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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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뒤, 해리슨 리 밴 뷰런은 다시 라즐로를 찾아 이전에 중단되었던 프로젝트를 재개하고자 한다. 라즐로는 어느 건축회사에서 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고 에르제벳은 어느 여성 신문 기자로서 일한다. 당연히 형편은 넉넉하지 못하다. 한편, 에르제벳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던 라즐로의 조카 조피아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이 대사는 전쟁의 상처로 인해 실어증을 앓던 조피아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첫 마디이다.


사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군인들에게 심문을 받던 여성은 바로 이 조피아이다. 그녀는 바로 그 장면부터 말하는 법을 잊었음을 관객에게 보인다. 그 침묵과 고통은 단순한 언어의 부재를 넘어, 전쟁이 그녀의 내면 깊숙이 할퀴고 간 ‘혀의 뿌리’를 상징한다. 에르제벳은 나레이션을 통해 이러한 상처와 분열을 관객에게 직접 설명하며, 각자의 뿌리가 전쟁이라는 칼날에 얼마나 크게 훼손되었는지를 상기시킨다.


이 과정에서 조피아는 본인들의 ‘뿌리’를 되찾아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이 영화 전체에서 조피아가 처음으로 하는 대사임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이는 잘려나간 뿌리를 되찾기 위해 본인들의 기원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조피아의 이 귀향의 선언은 그 회복의 성공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녀의 선택은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고, 자신의 뿌리와 연결되어 다시금 온전한 자아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반면, 라즐로와 에르제벳 부부는 미국이라는 척박한 땅에 남아, 비록 힘들고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뿌리를 내려 미래를 일구어가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라즐로 부부와 조피아 부부라는 두 쌍의 부부가 두 갈래의 길을 각각 선택함을 보여주는 대화이다. 잘려나간 뿌리를 되찾기 위해 회복의 길을 택하는 조피아와는 달리, 라즐로는 미국에 남아 그 척박한 땅에 새로이 뿌리를 자라나게 하겠다는 선택을 한다.


이상과 허상을 각각 조명했던 두 개의 가지는 하나의 줄기로 모인다. 상승의 국면을 지나 하락의 국면에 들어선 영화는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라즐로는 과거의 그 선량하고 성실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지쳐있다. 줄기에 잠식하던 허상의 씨앗은 그 줄기를 길게 뽑아냈고 그 줄기는 이미 라즐로라는 나무를 칭칭 감고 있다. 건축 현장에서 한 노동자가 동료들과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며 라즐로는 불같이 화를 낸다. 그의 부주의로 인해 건축물에 해가 간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해당 시퀀스를 본 관객에게 찾아오는 것은 당혹감이다. 불같은 화를 낸 라즐로가 매몰차게 노동자를 해고해버리므로.


이 부분에서 영화는 <록키>나 <행복을 찾아서>와는 다른 국면의 결말을 맞을 것을 확실히 암시한다. 라즐로에게 가해지는 시련은 한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범주를 이미 넘어선다. 예컨대, 예배당에 배치할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해리슨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 오라치오를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대리석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공수해 오기로 결정한 날 밤, 라즐로와 해리슨은 오라치오의 레지스탕스들이 벌이는 파티에 참여하게 된다. 한창 마시고 즐기던 중, 라즐로는 슬며시 자리를 떠나고 외진 곳에 약에 취해 널브러진다. 해리슨은 라즐로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찾아 바깥으로 나온다.


술과 약에 취해 쓰러져있는 라즐로를 발견한 해리슨은 그에게 다가가 그를 위하는 척하며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당신네들은 왜 그렇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을 해놓고 다시 동정을 요구하지?” 그리고 그는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린 후, 라즐로를 범한다. 라즐로를 향해 ‘창녀’라 칭하는 모욕은 덤이다. 해리슨에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모욕을 당한 라즐로가 마냥 선량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라는 땅에서 당한 수모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라즐로는 그를 걱정하는 고든과 에르제벳에게까지 분노를 쏟아낸다.


미국의 현실에 잠식당한 그는 더는 가지를 뻗어 나가지 못하고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라즐로 토스라는 이름의 명망 있던 우람한 나무는 점차 말라가고 줄기와 가지가 모두 뻣뻣해져 간다. 점차 말라 죽어가는 남편을 보며 에르제벳은 안타까움을 표하나, 사랑만으로는 나무를 살릴 수 없다. 에르제벳과 함께 탑승한 차 안에서 라즐로는 이 땅에서 자신이 겪은 수모를 떠올리며 울분을 터뜨리고 에르제벳은 “불쌍한 내 남편,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라는 대사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 수모를 겪고 완성된 건축물은 어떠한 모습인가. 그 수모와 좌절, 그리고 시간의 침묵을 견디고 마침내 완공된 건축물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해리슨은 이 건축물이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과 소통의 장이 될 것이라 호언장담한다. 그는 이 공간을 ‘어머니의 사랑을 담은 공간’이자 ‘공동체의 이상’이 구현된 장소로 그리고자 했고, 라즐로의 손을 통해 그것이 실현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정작 카메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완공된 건축물의 모습은 다소 기묘하다. 이 결과물은 관객이 기대하는 바를 완벽히 배반한다.


은막 위에 펼쳐지는 풍경 속에서 관객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감정과 온기를 완전히 제거한 듯한 회색빛 콘크리트 벽의 단단함과 삭막함뿐이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이 벽은 이질적일 만큼 딱딱하고 메마르며, 마치 사람의 손이 아닌 거대한 기계에 의해 조립된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인간의 체온을 완벽히 차단한 듯한 이 구조물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기계 혹은 감옥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완고하고 비인간적인 마감 속에서, 해리슨이 그토록 열망하던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영화 제목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가 담고 있던 복선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는 단순히 콘크리트를 주로 사용하는 건축 양식 ‘브루탈리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넘어서,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 이 차갑고 거친 질감은 라즐로가 처음으로 관객에게 선보인 그의 작품, 즉 해리슨의 서재에서 느껴졌던 따뜻하고 현대적인 양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 그 건축물에서 전해졌던 햇빛에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라즐로의 내면 또한 황량해져 그 반짝임이 온전히 소실된 모습이 드러난다.


라즐로는 자신의 반짝임의 상실의 연유를 에르제벳에게 털어놓는다. 에르제벳이 골다공증으로 고통의 비명을 지르던 날, 라즐로는 감추어두었던 약을 그녀에게 주사한다. 약 기운에서 비롯된 황홀경이 끝난 뒤, 에르제벳은 화장실에 들어가 기절하고 라즐로는 그녀를 서둘러 병원으로 옮긴다. 그리고 에르제벳은 병원에서 깨어난 뒤 라즐로에게 미국은 썩었다고 이야기하며 조피아를 따라 이스라엘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 뒤의 장면에서 라즐로는 자신이 당했던 수모를 에르제벳에게 털어놨음을 넌지시 보이는 시퀀스가 등장한다.


해리슨이 몇 명의 사업가들과 저녁 자리를 가지는 곳에 에르제벳은 보행기를 끌고 등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해리슨이 라즐로를 강간했음을 폭로한다. 해리슨은 분노하여 라즐로를 약물 중독자라고 모욕한 뒤 해고한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죄악을 부정하며 주변에 그녀를 끌어내기를 종용한다. 아들인 해리가 그녀를 끌어내고 난 후, 자리에 돌아오지만, 해리슨은 보이지 않는다. 당황한 해리는 그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사람들과 해리슨을 찾기 위해 라즐로의 콘크리트 건축물로 향한다. 수색을 나선 이들이 해리슨의 이름을 외치며 그를 찾는 동안, 카메라는 라즐로가 공수해온 청금색의 대리석 위로 달빛이 비추이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춘다.


라즐로는 록키 발보아나 크리스 가드너와는 달리 미국에서 온전히 정착하는 데에 실패한다. 이 실패는 ‘뿌리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록키와 가드너 모두 가난과 결핍에 시달리지만, 그들은 ‘미국인’으로 태어나 그 정체성을 타고난 이들이다. 그들은 고국을 떠나온 바가 없이 미국인이 뿌린 씨앗으로부터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라즐로는 다르다. 그는 미국이 재배한 존재가 아닌 역사가 우악스럽게 옮긴 존재이다. 그 과정에서 그의 뿌리는 잘려나가고 상처를 입는다. 뿌리가 잘린 나무는 그 척박한 땅에 새로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려 하지만, 그 상흔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메말라버린다.


그렇게 라즐로의 삶은 몰락으로 끝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은 완전히 소실되지 않는다. 2부의 이야기가 끝나고 영화는 짧은 에필로그를 상영한다. 기나긴 세월이 흘러, 1980년 열렸던 첫 번째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서 조피아는 몸이 불편한 라즐로를 앞에 두고 그를 향한 헌사를 바친다. 과거 고통에 시달리던 라즐로의 그 천재성이 시대가 지나 다시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순간이다. 비록 그의 몸은 정신적 고통과 약물의 후유증으로 망가졌음이 눈에 보이지만, 현대에 들어서 많은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메마른 콘크리트 건축물에 덩그러니 놓인 청금색의 대리석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 메말라버린 나무가 가까스로 맺어낸 하나의 열매로 보인다. 그 과실에 내포된 씨앗이 새로이 땅에 심어지고, 그곳에서 새로이 뿌리가 자라난다. 그리고 그 씨앗은 새로운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난다. 그렇게 하나의 메마른 나무가 간신히 틔워낸 씨앗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는 아름드리나무를 틔워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렇게 영화는 새로운 숲의 탄생을 예지하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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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대인 부부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쳐온 미국 땅에서 겪는 수모라는 플롯은, 당연하게도 ‘시오니즘’이라는 정치적 해석의 꼬리표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자신이 뿌리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는 조피아의 선언을 상기한다면 그러한 시선엔 신빙성이 더해진다. 그러나 귀환의 내러티브 이전, 한 인간이 낯선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악전고투하는 서사의 처연함이 내게는 우선적으로 보인다. 인간이 살아가고자 함에 있어서 그 인간의 인종 따위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 그런 갈등으로 우리의 삶을 허비하기에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 정치 이전에 삶이 존재하고, 인종 이전에 인간이 존재한다. 시오니즘 그 이전엔 ‘휴머니즘’이 존재한다.


나치의 침공으로 인해 낯선 땅으로 도망쳐온 이방인이라는 영화의 서사에 가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라즐로가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미국이라는 국가는 오로지 이방인들에 의해 건설된 나라였으며, 그 '이방인'이라는 말조차도 백인 유럽 이민자들 중심의 시각에서 정의된 개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땅의 최초의 주인은 오늘날 ‘인디언’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이라는 이름조차도, 그들을 인도인으로 착각한 유럽 이민자들의 오만과 무지에서 비롯된 단어일 뿐이다. 잘못된 언어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폭력의 시작이자 정당화의 수단이었다. 이처럼, 착오와 폭력의 언어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브루탈리스트>는 단지 라즐로 토스라는 한 유대인의 몰락사를 넘어, ‘이 땅에 누가 과연 뿌리를 내릴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라즐로의 몸과 입을 빌려 이 질문이 공정하지 않다는 항의를 한다.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내딛은 발걸음들은 모두 뿌리 없는 자들의 것이었고, 라즐로는 그 비극적 계보의 마지막 가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과거에 그 성공의 과실을 맛본 이들은 마지막 가지에 매달린 이들에게 자신이 맛본 과육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그 결과, 잘려나간 뿌리에서 시작된 그 나무는 결국 시들어버렸고, 그로부터 더는 가지도, 잎도 뻗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 순간, 기묘한 희망의 메시지를 남긴다. 청금색의 대리석을 씨앗으로 바라보면, 이로부터 새로운 뿌리가 자라나 하나의 ‘세계수’를 틔워낼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가능하다. 뿌리가 잘린 나무는 시들어 가지만, 그 나무가 품고 있던 감각과 서사마저 함께 시들어가지는 않는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죽어버린 이야기가 종 전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무에 가해진 고통이, 그 가혹함의 정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극단으로 달했다는 점은 오히려 새로운 씨앗의 양분으로 훌륭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후대로 그 역할을 물려준 재생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역설적이고,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희망이다.


그 씨앗이 자라난 나무는 비단 미래의 비엔날레에 선보여지는 과거의 건축물을 향한 헌사만은 아니다. 나무의 다른 이름은 영화다. 시네마는 그의 고통과 단절, 부조리와 분루를 기록하여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더불어 <브루탈리스트>라는 이름 아래 놓인 이 서사는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발생한 아메리칸 드림의 희생양을 라즐로 토스라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기록한다. 라즐로의 뿌리는 잘려나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네마는 그 잘린 뿌리를 양분 삼아 싹을 틔워낸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리지만, 그가 남긴 대리석 한 조각은 관객들의 내면 어딘가에 묻혀 자라나기 시작한다. 비록 그것이 당장 울창한 숲을 이루지는 못하나, 라즐로의 잘려나간 뿌리를 양분 삼아 따스함 속에서 그 싹을 틔워내고 줄기를 자라나게 한다. 이윽고, 그 싹은 마음 전반으로 번져나간다. 하나의 잔디밭이 완성되고, 그 잔디밭은 풀밭으로, 그리고 어느새 울창한 숲으로 자라난다. 그 숲이 자라난 뒤, <브루탈리스트>에 우뚝 서 있던 라즐로의 콘크리트 건물은 더 이상 죽어있는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비로소 숲 한가운데 놓인 쉼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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