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https://www.youtube.com/watch?v=tN4qyhWBFDk
가슴 한 켠에 시름이 켜켜이 쌓여 구조물을 이루고, 그것이 위태로운 높이에 이르면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필히 '붕괴'이다. 해준이 서래를 향해 건넸던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그 쌉쌀한 고백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래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서래, 본인의 알리바이를 창조해내기 위한 위장은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 한 채 애정이 되어 어느덧 높이 쌓였고, 해준의 한 마디는 강풍이 되어 그 구조물을 강하게 흔든다.
해준이 떠나온 곳은 그의 아내가 근무하는 '이포'이다. 그 동네엔 언제나 안개가 자욱하다. 붕괴한 두 남녀의 마음을 재현한 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갑갑함만이 남았다. 그 응어리진 마음은 공허함과 불면증을 함께 안기고 해준은 과거에 발목이 잡힌다.
내가 그리 우습냐는 그의 질문에 서래는 울먹이며 '내가 그리 나쁩니까?'로 답한다. 분명 나쁜 이라지만 말문이 턱 막힌다. 일말의 정이랄 게 없다면 매몰차게 뿌리칠 말일테지만 이마저 얹히는 모습이다. 그곳, 이포에는 안개 너머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 하는 두 남녀가 서있다.
서래는 해준에게 '안개'라는 노래를 들려주고 해준은 이를 자신의 재생 목록에 넣어둔다. 이 오래된, 해준의 말을 빌리자면 소위 '구닥다리' 노래는 이포의 주제가이다.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그 가사와 같이, 서래는 해준의 모습을 훔쳐보며, 그 다정했던 그림자를 따라간다.
언젠가 해준은 서래의 모습을 관음했다. 밤마다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이며, 찬찬히 그녀의 행동거지를 기록해갔고 그 모습을 스마트워치에 담았다. 이포에 그의 그림자를 좇아 다가간 그녀는 과거 그의 모습과 같이 그 곁을 서성이며 그의 모습을 같은 방식으로 담는다. 한 때 해준이 그녀에겐 그림자였으나, 이제는 그녀가 해준의 그림자가 되는 모습이다.
진득하니 떨어질 수 없는, 아니 떨어지기 싫은 존재로 남아 곁을 서성이며 그저 단 한번이라도 만나기만을 소원하던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금기된 관계인 경찰과 피의자라는 신분이다. 바닷가에 서있는 서래를 향해 다가가던 해준의 시선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음산한 사운드와 함께 마치 그녀를 살해할 듯한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윽고 그 앞에 멈추어선 해준의 얼굴을 비추어준다. 호미산에서 해준의 뒤를 바라보며 그에게 다가서는 서래의 모습 역시 그와 겹쳐진다.
그러나 멈추어선 해준과는 달리, 서래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두 개의 그림자, 하나로 포개어졌다.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게 지상과는 달리 산 중턱에는 눈이 나리고, 두 남녀가 잠시 포개어졌다가 나뉘어진 뒤, 서래는 그에게 짧고도 기막힌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극의 끝에 다다라 그녀는 그 인사처럼 그의 미제 사건으로 남는다.
끝끝내 엇갈린 두 남녀는 서로를 가슴에 자욱하게 안개로 남긴다. 서로의 '헤어질 결심'이 지워지지 않을 잔향이 되었다. 이포의 주제가 '안개'의 가사가 그들의 처연한 바람만을 대신 이야기한다.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