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후에 행복은 찾아오는지>
근미래의 일본, 지진이 일어난 후, 총리 키토는 국민의 안전을 내세워 통제를 강화한다. 그리고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정서를 부추긴다. 재일한국인 '코우'의 가게 앞에는 '비국민'이라는 낙서(낙인)이 적히고, 공권력은 그를 향해 언제나 차별을 가한다. 역사적 사건, '관동대지진'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이 묘사를 본다면 흔한 반일정서를 자극하는 한국 영화겠거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해피 엔드>는 일본영화이다. 일본의 감독이 이 묘한 기시감을 자극하는 것을 두고 누군가는 우연의 일치로 치부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감독 그 자신은 영화의 히로인 '후미'의 이름을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에게서 가져온 것이라 밝힌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러한 기시감은 감독의 철저한 의도로 읽힌다.
영화의 배경인 근미래의 일본은 민주주의와 파시즘 그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점들과 제목을 연관짓는다면 불현듯 불안한 느낌이 든다. 으레 '해피 엔드(Happy End)'라는 제목을 사용하는 컨텐츠는 반어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예를 들자면, 동명의 한국 영화 <해피 엔드>(1999)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순수하게 해피엔딩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존재해야한다는 역설도 있다. 각종 동화 속의 마무리로 등장하는 문구, 'Happily ever after.(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마녀나 용 등의 사악한 존재의 개입 이후에 이루어진다. 영화의 경우, 그 사악한 존재는 '권력자'라는 계급으로 설정한다.
키토 총리 등으로 상징되는 권력자의 모습은 학교의 교장이라는 모습으로 상징된다. 말하자면 영화의 '마녀'는 교장인 셈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등의 작품과 같이 정치 풍자극에서 다른 배경을 빗대어 극을 전개해나가는 것은 전통에 가까운 방식이다. 그러한 점에서 <해피 엔드>는 그 전통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정치 풍자극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학생들의 안전 등을 이유로 감시 체계를 정당화하고 벌점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려 드는 것은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정권의 특질이다. '유타'와 '코우'가 장난으로 직각으로 세워놓은 교장의 자동차가 지진 후 거꾸로 쓰러지자, 교장은 학생의 안전을 위한다는 허울좋은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파놉티'라는 이름의 ai를 도입한다. 당연하지만 이 이름은 '파놉티콘'에서 가져온 것으로,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독이 의도한 바를 어렵지 않게 파악이 가능하다.
다만, 이 정치 풍자극의 면모에서 영화를 향해 흡족한 박수를 쳐주긴 어렵다. 영화의 히로인 '후미'의 첫 등장은 현실의 대화 맥락에서 보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인물 간의 친소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후미는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어 분위기를 장악한다. 이는 인물의 '문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지만, 연극적 톤이 강해 극적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후미'라는 인물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불의에 항거하는 인물이라는 표현을 하기 위한 연출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러나 해당장면을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민망하다. 배경 자체가 학교이다보니 이러한 후미의 저항의식은 다소 철부지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주요인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오히려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로 시작하는 인터넷 밈을 떠오르게 한다.
이처럼 정치풍자물로서는 다소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는 점은 내게 있어서는 조금 아쉽다. 하지만 영화의 또 다른 성격인 성장물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이 통제와 검열의 시대 속, '코우'와 '유타' 그리고 다른 인물들은 제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택한다. 누군가는 부조리한 현실을 회피하고, 누군가는 투쟁하며, 누군가는 조금 저항하는 듯하다 순응하고, 또 누군가는 떠난다. 그리고 택하는 방식에 따라 그들은 각자의 모습으로 성장한다.
다시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영화는 정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가. 그것은 관점에 따라 작용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각자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 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에 영화는 막을 내리는 순간 명백한 답을 내리지 않지만, 관객은 그 이후를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직각으로 선 차는 결국 어느 쪽으로든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가해진 지진, 검열은 그 쓰러짐의 방향을 결정했을 뿐이다. 아무튼 지진은 지나갔고 차는 쓰러졌다. 직각으로 선 그들에게 가해진 지진, '파놉티'의 검열은 그들을 과연 어느 방향으로 쓰러뜨릴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