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어쩔 수 없는 브루주아인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정치권에서 그 이름이 여러차례 등장할 것이다. 어떠한 영화는 정치권에서 특정한 상황이 찾아왔을 경우, 그 제목을 따와 인용하며 말하는 것이 보편적이므로. 예컨대,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와 같이 말이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은 그만큼이나 한국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감독임에 자명하다. 어느덧 '봉박'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대명사처럼 영화계의 두 거장을 칭하는 말이 되었고,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 이들이라도 이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으리라.
그만큼이나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실력과 네임밸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이들은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 하나의 물음을 역으로 던진다. 그는 기득권인가. 과연 세상이 일반적으로 정하는 틀에서의 계급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브루주아 중 어느 쪽에 더 가깝게 속해있는 인물일 것인가. 아마 이 질문을 듣는 이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확신한다. '당연히 박찬욱은 브루주아이지.'
그의 신작 <어쩔수가없다>(2025)는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가 없이' 그의 브루주아적 정체성이 드러난 작품이라 칭할만하다. 분명 내용적으로는 한 해고노동자의 고군분투와 극단적인 선택, 그리고 '을'들이 벌이는 드잡이와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잡아먹는 현대사회 신자유주의의 비정함을 그린 작품이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박찬욱이라는 감독 개인의 귀족적 취향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제지회사에서 25년 근속한 주인공 유만수(이병헌)의 가족을 처음으로 은막 위에 드러내는 장면으로 되돌아가보자. 마당과 분재창고가 있는 2층의 단독주택에서 강아지 2마리가 등장한다. 가족은 그 마당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며 주변에는 그들이 심은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보인다. 만수는 아내 미리(손예진)에게 신발을 선물하고 딸 리원(최소율)은 첼로를 연주한다. 만수는 이들과 바베큐 파티를 벌이며 마당에서 그들을 끌어안고 '다 이뤘다'라며 만족스럽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25년이나 근속한만큼, 그에게 그러한 생활은 사치라고 부르긴 어려울 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가 회사에서 '잘린' 이후에 등장한다. 약속한 석 달이 지나도록 재취업에 실패했을 때에서야, 미리는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며 허리띠를 졸라멘다. 분명 미리는 테니스와 댄스를 그만두고, 가정은 넷플릭스를 끊고, 강아지 두 마리는 어머니의 집으로 보내며 차 두 대는 정리하고 만수의 작은 승용차 하나만을 남긴다. 분명 가정은 긴축재정을 실행함을 명백히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만수가 어째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공감을 못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말하자면, '만수가 과연 어쩔 수가 없었는가?'라는 물음이 따라붙는 것이다. 이 물음이 따라오는 근원은 해고노동자의 궁핍함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만수가 마지막 제거 대상인 선출(박희순)을 찾아가는 장면을 되돌아보자. 선출을 제거하기 위해 찾아간 만수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가의 위스키를 준비해간다. 그런데 이는 사실 다소 부자연스럽다. 분명 집에 채납고지서가 날아오는 환경에서 고가의 위스키를 구매해 간다는 것은 오히려 사치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해당 위스키는 스프링뱅크 15년 산으로 대략 50만원 선에서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집에 예전에 구비해둔 것일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분명 만수는 9년이라는 시간동안 금주를 해왔음을 영화는 명백히 밝힌다.
생각해보면 영화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서민적인 모습을 거의 비춰주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소주의 등장이 그렇다. 영화에서 소주가 등장하는 장면은 만수와 같은 해고노동자이자 그의 제거대상인 범모(이성민)가 실의에 빠져지내는 모습을 비춰줄 때 뿐이다. 그 장면에서조차도 소주는 서민의 애환을 털어내는 친서민적 장치라기보다는 '벌레'로 상징되는 범모의 내면을 갉아먹어가는 절망감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소위 '고고한' 미학이라는 점이 만수에게만 드러난다면 이는 가까스로 거머쥔 중산층이라는 신분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한 남성의 처절한 몸부림 정도로 볼 수 있겠으나, 문제는 범모 역시 이러한 포인트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범모의 취미는 고급 오디오 수집이다. 오디오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재력과 정성을 요하는 취미이다. 특히 하이엔드 오디오라 불리는 장비들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가격대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청음실과 방음 장치, 공간 배치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단순한 음악 감상이 아니라 ‘음향을 감식하는 안목’이라는 문화적 자본까지 필요로 하는, 말 그대로 귀족적 취향의 영역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보면 <어쩔수가없다>는 한 브루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바라보는 한계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해고 노동자의 고군분투를 그 귀족적인 미학으로 바라본 느낌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그러한 종류의 취미를 즐겨서는 안 된다는 선민의식이나 차별적 시선이 아니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취향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지는 이미지와 다소 동떨어짐을 지적하는 것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영화 <파업>(1925)을 자평하며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나는 소를 도축하는 장면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시도는 실패했다. 소의 도축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브루주아의 정체성을 지닌 이가 프롤레타리아의 삶과 역경을 묘사하는 데에 빠지는 함정은 그런 것이다. 박찬욱 감독 역시 에이젠슈타인이 빠진 함정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선은 여타 해고 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것보다는, 그 현실 위에 투영된 자신의 미학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