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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러 가는 길(2025) 이야기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그 세계 바깥은 찬바람이 분다.>

by 조성현

"새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제 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올라온 <지우러 가는 길>(2025)은 미성년자 임신과 낙태라는 다소 파격적이면서도 불편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불행의 굴레는 상실로부터 발현한다.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윤지는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에 휩쓸려 유부남인 학교 교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결과 임신이라는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결과를 받아들이고, 교사 종성은 이 책임으로부터 도피한다.


이 불편한 이야기는 소외된 이들, 그리고 부재를 앓고 있는 이들이 겪는 공허함이 또 하나의 비극을 생성해내고 다시 한번 그 굴레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구도를 그린다. 그 비극의 굴레는 윤지와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다른 주인공, 경선에게서도 드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낙태를 위해 경선의 돈에 손을 댄 윤지가 경선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는 바로 그 '부재'이다.


이 부재를 겪는 이들은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이 앓고 있는 것을 의식적으로 치유하려 노력한다. 이미 날카롭게 베인 상처가 곪아서 짓물러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에 대처할 방안은 없기에 자신만의 의식을 탑처럼 쌓아 그 안에서 이상을 찾으려 골몰하는 것이다.


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이는 윤지 하나 뿐이 아니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중 종성의 아내인 민영 역시 그녀와 같이 시련 앞에 자신의 세상을 만든다. 적대적이어야만 할 두 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통적으로 현실에 닥친 고통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건설하고 그 안에 들어간다. 이미 알고 있는 가혹한 진실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날카로운 칼바람이다. 하나의 세상을 깨뜨리고 나온 바깥은 너무나 춥다.


재미있게도 영화에는 이 세계를 부수어내지 않고 그 안에서 아늑함을 찾아낸 이 역시 등장한다. 바로 경선의 엄마이다. 앞에 언급했다시피, 윤지와 경선은 부재를 통해 본격적으로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부재의 포인트는 바로 가족이다. 어린 고등학생 자녀를 몰래 버리고 도주해버린 아버지를 가진 윤지와,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경선은 공통적으로 무책임한 아버지로부터 얻은 상처를 고스란히 가진다.


그리고 이 세계를 지켜낸 결과, 경선의 엄마는 본인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며 살아간다.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느냐, 혹은 부수어내느냐의 경계에서 혼돈을 겪는 윤지와 민영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세계로부터 탄생한 이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 딸 경선은 그로 인한 죄책감을 짊어지며 살아간다. 말하자면 알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는 아늑하나, 깨어나버린 이는 찬바람을 정면에서 맞닥뜨리는 것이다.


데미안의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라는 메모는 싱클레어의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한 그의 염원이 담겼다. 알 내부가 아늑하다 한들 그 안에 갇혀있다면 필히 죽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때때로 누군가에게는 그 알 바깥의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혹하기도 하다. 안에서 곪아 죽을텐가, 바깥으로 나와 고통에 얽메이다 죽을텐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라 하지만, 너무나 힘겨울 것이 자명한 일을 과연 누가 강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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