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울리기까지는 부재가 그 틈을 메운다>
존 케이지의 <4:33>은 대중들에게 있어 많은 논란을 일으킨 곡이다. 제목과 같이 4분 33초의 재생시간을 가지는 이 곡은, 그야말로 4분 33초의 시간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는 곡으로 유명하다. 공연장에서 연주자가 올라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청중들은 제각기 다른 소리를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고요 속에서 터져나오는 청중들의 하품소리, 혹은 기침소리 등의 소음이 되려 곡을 만드는 하나의 매개체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악기가 필요없는 이 곡은 침묵을 하나의 악기로 삼아 곡을 연주한다.
영화는 사운드트랙을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수단으로서 자주 애용한다. 그러나 그 활용이라는 것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은 극 전체에 음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경우, 도리어 사운드트랙을 제거하고 영화 내부에 등장하는 효과음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서늘한 감각을 전달한다. 예컨대, 영화의 커튼콜 장면이라 할 수 있는 동진(송강호)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관객에게 제공되는 것은 동진의 숨이 껄떡이며 넘어가는 소리이다. 음악의 부재가 되려 끔찍한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과거에 탕아로 살던 이가 마음을 다잡고 정착하여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악당들의 일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소중한 이를 잃는다. 이에 분노한 탕아는 자신이 숨겨두었던 과거의 실력을 꺼내들어 악당들을 응징한다. 어찌보면 이 '돌아온 탕아'라는 소재의 플롯은 매우 진부하다. 당장 이 시놉시스만 그대로 가져다 일반 대중에게 이야기하면 <존 윅>(2014)을 떠올릴 것이다. 혹은 <테이큰>(2008)의 설명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묘사이다. 물론 이는 이 글의 주제로 다루고자 하는 영화 <올드 헨리>(2021)의 시놉시스이다.
그러나 영화 <올드 헨리>에는 위의 <복수는 나의 것>의 연출이 오버랩된다. 주인공 헨리(팀 블레이크 넬슨)가 수상한 세 남자를 발견하고 그들을 염탐하기 위해 수풀로 잠입한 순간, 남성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행동을 멈춘다. 이윽고, 일행 중 한명인 멕시코 인이 손에 칼을 쥐고 수풀을 조심스레 헤쳐나가기 시작하고 그 뒤를 다른 일행이 따라붙는다. 수풀을 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리던 중, 두 남성은 멈춰선다. 그리고 뒤에 따라붙던 남성의 총에서 탕!하며 총성이 울린다. 그 곳엔 풀들이 뉘여있는 모습으로 사람이 있었던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들이 허탕을 친 것을 드러낸 이후, 카메라는 말을 타고 현장을 벗어나는 헨리의 모습을 비춰준다. 결과적으로, 이 장면에서 관객은 음악의 안내없이 숨 죽이며 화면을 응시하게 되는 서스펜스를 겪는다.
물론, <복수는 나의 것> 그리고 <올드 헨리>에서 사운드 트랙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극의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수단으로서는 '음악의 부재'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특히, <올드 헨리>의 경우 99분의 런닝타임 중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총격전이 벌어진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 이전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거나 고조시키는 수단으로써 부재의 역할에 더욱 주목이 갈 수밖에 없다. 정확히 이 영화는 후반부의 총격전을 위해 빌드업을 쌓아올리는 것에 중점이 맞추어진다. 그 과정에 있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은 몇 차례의 대화와 크게 새로울 것 없는 플롯 정도이다.
이 얼핏보면 특별할 것 없는 서사의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올드 헨리>는 단순히 진부한 플롯에 머무르지 않는다. 음악의 부재라는 연출적 선택이 극의 긴장감을 채우며, '돌아온 탕아'라는 서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변주한다. 존 케이지가 침묵을 하나의 악기로 연주했듯, <올드 헨리>는 음악의 부재를 통해 관객의 긴장과 감각을 극대화한다. 이때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장치가 된다. 존 케이지가 연주했던 침묵이라는 악기는, 영화에서 그 공명을 널리 퍼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