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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1940)와 백설공주(2025) 이야기

<푸른 요정이 아니라도 알아차릴 어설픈 거짓말>

by 조성현

1940년 개봉한 디즈니의 <피노키오>의 시작은 디즈니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명곡 <When you wish upon a Star>라는 사운드트랙을 귀뚜라미 '지미니 크리켓'이 부르며 막을 연다. 제 4의 벽을 뚫고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지미니는 극의 메신저로서 기능하며 중요한 캐릭터로서 활약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묘하다. 지미니는 자신을 귀뚜라미라고 소개하지만 사실 그 모습은 일반적인 귀뚜라미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지미니는 '전혀' 귀뚜라미를 닮지 않았다.


현실의 귀뚜라미는 6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갈색의 곤충이며, 사람에 따라서는 징그럽게 여겨질 외형을 가진다. 그러나 영화의 지미니는 초록빛 피부에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졌으며 의복까지 걸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풍부한 표정을 짓고 두 다리로 뛰고 걷는다. 귀뚜라미라고 주장은 하나 사실 그의 행동거지의 양태, 그리고 외형은 전형적인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가 귀뚜라미라고 생각하는 데에 조금의 의구심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납득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귀뚜라미라는 생명체를 떠올릴 때 일반적인 사람들은 울음소리, 즉 노래를 생각한다. 그리고 디즈니는 이 점을 정확히 활용한다. 극이 시작하는 순간, 지미니가 노래를 부르는 시퀀스는 그가 귀뚜라미일 수 있다는 인식을 은근히 심어놓는다. 노래가 끝난 후, 지미니는 자신을 귀뚜라미라고 소개하며 노래를 부르는 행위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지미니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순간은 단순히 노래하는 시퀀스 하나만은 아니다. 지미니가 제페토의 집을 발견한 순간을 되돌아보자. 지미니가 제페토의 집에 잠입하려는 순간, 카메라는 지미니의 시야로 제페토의 집을 바라보는 시선을 선사한다. 현대 영화에서도 자주 쓰이는 이 '주관적 시점'의 연출은 카메라를 등장인물의 눈과 일치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그가 향하는 시선을 관객에게 주입한다. 이에 따라, 지미니가 제페토의 집으로 다가설 때, 카메라는 마치 귀뚜라미가 움직이듯 위 아래로 펄쩍펄쩍 뛰는 모션을 취한다.


이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관객은 실제로 지미니는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나머지는 만화적 허용이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현실의 귀뚜라미와 전혀 다른 생김새의 지미니 크리켓은 관객들에게 귀뚜라미라는 생명체로 인식된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디즈니는 과거의 역량을 상실한 듯한 모습이다. 대중과 평론가들로부터 매몰차게 외면을 받았던 <백설공주>(2025)를 떠올려보자. 현대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디즈니는 히스패닉 계열의 여배우를 백설공주로 캐스팅한다. 여기에서 대중들이 근본적으로 가지는 의구심은 다음과 같다. '백설공주라는 이름은 눈처럼 흰 피부를 가졌기에 붙여진 이름이야.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히스패닉 여성을 캐스팅한거지?' 당연하게도 디즈니는 컨텐츠의 제작사로서 이러한 관객의 의문을 풀고 캐릭터에 개연성을 부여할 의무를 가진다.


디즈니가 택한 방식은 그녀가 '눈보라가 치는 날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단적인 문제로, 영화는 도입부에서 분명 백설공주의 부모인 왕과 왕비가 애민정신이 뛰어난 자애로운 인물이라고 언급하는데, 극의 배경은 중세 시대로 당대에 눈보라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몰고오는 대재앙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자애로운 왕과 왕비는 이러한 점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에게 딸이 탄생하였음만을 기뻐하며 폭설을 기념하는 이름을 그녀에게 수여한다. 굉장한 모순이다.


이러한 디즈니의 하락한 역량은 '오리지널리티'로부터 기원한다. 지미니 크리켓은 디즈니가 이름을 붙여 만든 디즈니 고유의 캐릭터로 제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어떻게 해당 캐릭터에게 귀뚜라미라는 정체성을 부여할 지 심도깊은 고민으로부터 탄생했다. 반면, 레이첼 지글러가 분한 백설공주는 기존에 존재했던 백설공주라는 캐릭터에 '억지로' 그녀의 인종적 특성을 끼워맞춰야만 하는 상태였다. 즉, 백설공주는 애시당초 탄생 때부터 유색인종의 캐스팅을 고려하고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부여된 추가적인 설정이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지미니 크리켓을 자연스럽게 귀뚜라미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술'이다. 그러나 관객을 성공적으로 기만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연출 기술이자 서사의 힘이다. 현대의 디즈니는 그러한 '기만의 미학'을 잊은 듯 보인다. 디즈니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상상력의 힘은 설정의 정교함과 설득력으로부터 기인하였다. 그리고 이 정교함은 고유함으로부터 생성되었다. 그들만의 아이덴티티가 영화사에 걸작이라 불리우는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일 히스패닉 인종의 배우를 상정하고 만드는 고유하고 새로운 프린세스였다면, 디즈니는 그러한 대실패를 경험하였을까. 디즈니가 다시 설득하는 이야기꾼으로 돌아오려면, 과거 지미니 크리켓을 만들던 그 치밀함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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