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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이야기

<혁명이 현실을 부딪히는 순간>

by 조성현

기나긴 연휴 동안, 영화에 관련한 뉴스를 장악한 것은 역시 <어쩔수가없다>였다. 그 유명 감독 박찬욱의 신작이니만큼, 당연히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은 이상할 이야기가 아니다. 그 외에 언급되는 영화로는 <보스>(2025)와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뉴스를 보며 다소 의아했던 것은 언론이 이 영화를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라며 소개를 한다는 점이었다. 보통 할리우드식의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는 영화로는 <미션임파서블> 시리즈나, <다이하드> 시리즈와 같이 그야말로 여러 사물들과 건물들을 때려부수며 호쾌한, 그야말로 '몸의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를 생각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명백히 이 문법에서는 벗어나 있다.


시놉시스를 보며 바로 생각나는 영화는 <테이큰>(2008)이라 생각한다. 과거 혁명 단체의 일원이던 팻 칼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밥 퍼거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박탄 크로스'라는 이름의 가상의 도시에 정착하며 살아간다. 그곳에서 딸, 윌라를 키워내며 살아가던 중, 자신의 숙적이 딸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이윽고 윌라가 사라지자, 아버지, 밥 퍼거슨은 딸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아주 축약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시놉시스 정도가 될 테고 이는 당연히 <테이큰>의 서사를 닮았다고 느껴질 만 하다. 말하자면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면, 어두운 과거를 가졌지만, 강한 무력을 가진 아버지가 딸을 구하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를 예상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영화 내부에서 주인공이자 아버지인 밥 퍼거슨은 그다지 강인한 인물은 아니다. 혁명의 동지이자 자신의 연인, 그리고 딸, 윌라의 어머니인 퍼피디아와 헤어지는 계기는 이제는 한 가정의 일원으로써 혁명을 해나갈 수 없다는 포인트이며, 윌라를 데리고 피신한 뒤에는 마약에 찌들어있다. 더욱이 윌라가 사라졌을 때, 과거 동지들에게 연락해서 암구호를 잊어버려 허둥거리기까지 한다. 이 허술함의 정점은 '센세' 세르히오(베네치오 델 토로)의 도움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나오는데, 그를 안내해주는 스케이트보더들을 따라가다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시퀀스가 그것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허탈감을 동반한 실소가 터져나온다. 계속된 허술함에도 결국은 과거 혁명전사였던 면모를 보이며 딸을 구출해내는 서사를 예상했던 관객들에게 폴 토마스 앤더슨이 사실상 '절대 너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겠다.'라며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돌이켜보면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에 그가 혁명단체의 일원으로써 얼마의 활약을 했던지 간에, 그는 엄연히 현장을 떠난 인물이고 더 이상 현장에서의 예리한 감각을 유지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물론 그의 역할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폭발물 전문가'라는 점도 그 허술함에 기인하는 포인트일 것이다.)


그렇기에 밥 퍼거슨의 '변모'는 매우 인간적이다. 퍼피디아를 향해 혁명을 포기하며 그저 '혁명 잘 다녀와'라며 작별을 고하는 모습에서는 정착하여 정상적인 가정을 형성하고픈 일종의 책임감이 드러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로 동작하던 뜨거운 피는 그 온도가 식었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 피를 달구는 새로운 열기로서 동작한다. 혁명의 전선에서 떠나간 그는 이제 소파에 누워서 대마초를 피워대며 구닥다리 혁명 영상이나 지켜보는 무기력한 아저씨가 되었으나, 자신의 숙적인 록조(숀 펜)가 자신과 딸을 제거하려고 하는 순간 그 둔해져버린 몸을 움직인다.


혁명전사 '팻 칼훈'은 무기력한 아저씨 '밥 퍼거슨'이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을 따라 둘은 완벽히 별개의 인물로 보인다. 시간이, 그리고 현실이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들었다. 혁명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순간, '전쟁영웅'은 녹슬어버렸다. 너무나 인간적인,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적인 이 씁쓸함은 역설적이게도 관객으로 하여금 실소가 터져나오게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적확한 장르는 '블랙코미디'라고 할 만하다.


밥 퍼거슨은 더 이상 총을 든 혁명가도, 영웅도 아니다. 그는 실패한 이상과 퇴색한 책임감 사이에서 겨우 숨 쉬는 한 인간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를 통해 ‘싸움’이란 더 이상 거대한 이념의 전장이 아니라, 무너져버린 자신과의 전투임을 말한다. 딸을 구하고자 부지런히 몸부림치지만, 그 흔한 영화에서조차 보이는 총탄저격마저 성공하지 못하는, 바로 그 밥 퍼거슨의 싸움이 우스꽝스러울수록, 우리는 더욱 깊은 연민으로 그를 바라보게 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그려내고자 한 것은, 그 실패를 겪으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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