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혐오는 건강에 좋다?>
오늘날을 묘사하는 표현 중 상당히 인상깊은 표어는 '대혐오의 시대'이다. 성별에 대한 혐오, 정치성향에 대한 혐오, 그리고 특정 세대에 대한 혐오까지 좌우, 남녀,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온갖 혐오표현이 양산되고 서로를 향해 어떤 표현이 가장 아프게 박힐까를 연구하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안쓰럽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를 공격할 때,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한 집단의 이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치'이다.
단적으로 젊은 세대들은 나이든 세대들을 향해 저들이 실제로 행하고 있는 성향이 나치와 다를 바가 없다라며 쏘아붙이고, 반대로 나이든 세대들은 젊은 세대들을 향해 나치 극우의 사상을 가졌다며 조롱한다. 어느 특정 세대의 편을 들고픈 마음은 없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이 공격의 수단으로 쓰이는 나치라는 집단이 없었더라면 상대를 향한 적확한 조롱의 단어를 찾기가 어려웠을 상황이라는 것은 기가 막힌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8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현재까지도 나치는 다양한 창작물에 대적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마블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의 숙적이 누구인지 떠올려보자. 하이드라에 소속된 나치 출신의 레드 스컬 아닌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거친 녀석들>(2009) 역시 대체 역사물로서 그 상대를 나치로 상정한다. 영화 뿐 아니라, 게임 등에도 나치를 도륙해야 할 적으로 설정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이른바, '혐오가 정당화되는' 대상이 바로 그 나치와 히틀러이다.
<언젠틀 오퍼레이션>(2024)은 이러한 정당한 혐오를 이용한 오락영화를 선보이겠다는 포부를 그 도입부에서 선언한다. 어선으로 위장한 거스 마치 필립스(헨리 카빌)의 배에 나치 독일의 군인들이 오른다. 배에 승선해 있던 엔더스 라센(앨런 리치슨)은 유쾌한 말투로 군인들에게 자신들은 스웨덴에서 요양 휴가를 나온 사람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나치의 장교는 자신에게 손을 대며 친근하게 구는 앤더슨 라센에게 신경질을 부린 뒤, 그들을 죽이겠다며 협박한다. 그러나 이윽고 배의 아래에 수색을 나섰던 병사들이 숨어있던 필립스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라센은 칼로 그 장교의 목을 그어버린다.
도입부를 보면, 가이 리치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과 같은 화끈한 나치 살육전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 도입부는 다소 통쾌하다. 다수의 대중 예술에서 죄책감없이 살육해도 되는 나치를 다량으로 학살해나간다는 서사는 피 튀기는 액션을 기대하던 이들에게는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올 법한 이야기이다. 이 기대를 영화가 충족시켰느냐 하면 일정 부분 동의는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적하고픈 부분은 어쩌면 너무나 쉬운 적을 상정해버린 것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는 하지만, 나치라면 학살의 대상으로 삼아도 되겠거니라는 생각은 다소 편의적이고 안일하게 보인다. 정당한 혐오의 대상이라는 명목으로 영국군의 활약을 조명하고자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들과는 상이한 시퀀스들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인간적인 나치는 없다.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독일 군인은 지휘관, 하인리히 뤼르(틸 슈바이거) 정도이나 그는 완전한 악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에서 등장한 '곰 유대인'의 희생양이 된 당당한 나치 장교의 모습이 보여주었던 아이러니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타란티노가 증오에 대해 조명하며 과연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잔학한 살해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진 것과는 달리 가이 리치는 오로지 통쾌하게 나치를 살육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말초적 자극을 선사할 수는 있겠으나, 꽤나 단선적이다. 말하자면, 타란티노의 총구는 증오 그 자체를 향한다면, 가이 리치의 총부리는 증오의 상품성을 재현한다. 두 감독 모두 나치를 죽이는 이야기를 써내려갔으나, 한쪽은 복수의 문법을 묻고, 다른 한쪽은 쾌락의 문법에 안주한다. 오해하지는 않기를 바라며 덧붙인다. 물론 나치는,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역사에 두번 다시는 등장해서는 안 될 괴물들이다. 그러나 과연 전쟁에 투입된 나치 독일 군인들은 전부 악인이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역설했다. 악이란 개별 인물의 타고난 사악함이 아닌 사유하고자 하지 않은 무지함으로 인해 비롯한다. 비록 그 말의 어원은 나치의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으로 인해 생겨났지만, 어쩌면 현대 사회에 보이는 상대방을 향한 손가락질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치에게는 그래도 돼.'에 이어 '너는 나치와 같은 족속이야.'라는 생각이 결합되어 '그러니 너에게는 그래도 돼.'라는 방식의 삼단논법이 형성되는 현실이 조금은 두렵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 손가락질의 근원에는 '정당한 혐오'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근래 탄생하는 영화들의 정치적 함의를 바라보며 느껴온 불안감의 근원은 어쩌면 증오를 정당화하는 평범성으로부터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