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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2025) 이야기

<물보다 진한 관성의 피, 그리고 그 외의 하나>

by 조성현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수의 대중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소설에 등장하는 피조물의 이름으로 인식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크리쳐, 즉 피조물을 탄생시킨 창조주의 이름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으로 전도유망한 생명공학도인 박사가 죽은 자들의 시신을 기워만드는 것으로 '괴물'을 탄생시켰으며, 정확히는 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이름을 가져와 소설의 제목으로 지은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러나 피조물을 프랑켄슈타인으로 부르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창조주, 즉 어버이로 다르게 말하자면 피조물은 그의 자식이요, 자식이 그 아비의 성을 따르는 것은 일반적 관습이므로.


그렇기에 피조물의 혐오스러운 외형을 차치하고 생각해보자면, 이 이야기는 애초에 괴물이 괴물을 낳은 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2025)는 정확히 이 관점에서 출발해 영화를 바라본다. 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학술적 정복욕에 휩싸여 하나의 비극 서사를 만들어낸 원작과는 달리, 감독은 이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넘어 아비와 자식의 이야기로 확장해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작과는 다른 각색을 취해 나간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흰색과 붉은 색을 교차시켜 나간다. 빅터가 그의 어머니와 작별하는 순간을 되돌아보자. 어머니는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빅터는 흰 옷을 입고 있다. 둘은 포커를 치며 화목한 분위기 속에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이윽고, 어머니에게 산통이 찾아오고 빅터는 저명한 의사였던 아버지를 소리쳐 부르며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어머니는 분만 이전에 빅터를 부여잡고, 빅터의 흰 옷과 뺨 위에 어머니의 붉은 피가 묻는다. 이윽고 망연자실하며 뒤돌아서는 빅터에게서 카메라는 줌 아웃하고, 그의 양 옆으로 붉은 무늬가 아로새겨진 두개의 대리석 기둥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흰색의 옷에 선명하게 새겨진 어머니의 손자국과 같이, 빅터의 내면에는 죽음에 대한 정복욕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는 확신어린 의심과 함께, 그의 흰 피부 아래에는 그 대리석 기둥에 어린 붉은 기운과 같이 미련과 욕망이 맥박친다. 마치 그의 흰 살결 아래 요동치며 움직여가는 피와 같다. 그리고 이 정복욕은 빅터라는 인간의 동력이 된다. 이 강력히 동작하는 '배교자'에게 무한한 자원금이 등장하는 것은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리하여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의 피조물, '크리쳐'를 탄생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여기에서 일종의 선형적 구조가 드러난다. 그 상냥한 어머니를 그리며 연구에 매진해왔던 빅터였으나, 정작 그가 자신의 피조물에게 드러내는 행동은 마치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아버지와 같다. 빅터가 의학 지식을 기억하지 못 하자, 손도 아닌 얼굴을 향해 회초리를 날리던 그 괴물과 같던 아버지의 모습은 피조물을 향해 지성을 드러내지 못한다며 난폭한 모습을 보이는 빅터에게 오버랩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증오를 드러내던 아버지의 피가 빅터의 내부에서 흐르는 모습이다. 그리고 피조물에게 있어 빅터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자, 동생의 약혼자 엘리자베스이다. 즉, 이 선형적 구조는 괴물이 괴물을 잉태하는 구조로 귀결되어진다.


아버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며, 그 우울한 기질과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논하던 빅터는 정작 자신의 피조물을 향해 자신이 바라던 지성을 보이지 못 한다며, 즉 자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학대하듯 한다. 그리고 이 증오를 이어받은 피조물이 빅터를 향해 원한을 품는 구조로 이어진다. 생각해보자면, 피조물은 실험의 결과물로서 빅터와 단 한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그 증오의 구조는 그대로 이어받는다. 오로지 '빅터'라는 단어 하나만 되풀이한다는 빅터의 푸념에, 엘리자베스는 '그에게는 당신이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이라는 부모와 자식의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실망감에 눈이 멀어버린 빅터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 한다. 그리고 이 섣부른 실망감은 피조물에게 증오를 심어주는 관성으로 작용한다.


피조물의 흰 피부 아래에는 붉은 피가 흐른다. 그 아버지인 빅터가 그를 동작하게 하기 위해 심어놓은 피에는 그의 정복욕과 분노가 담겼다. 이를 후에 확인한 피조물은 자신은 그저 누더기일 뿐이라며, 슬픔에 휩싸인다. 이 부분에서 빅터가 느꼈던 아버지와의 외모적 차이로 인한 푸대접이 떠오른다. 그 아비에 그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이 하나의 아비가 되어 그 전임자의 죄악을 되풀이하는 모습이다. 이를 보듬어주던 존재가 빅터에겐 어머니요, 피조물에겐 엘리자베스이나, 빅터는 어머니를 아버지의 무책임 속에 잃었으며 피조물은 빅터의 손에 엘리자베스를 잃는다. 그 빅터가 겪었던 상실의 비극마저 자식에게 되풀이된다. 빅터의 흰 옷 위에 새겨진 어머니의 붉은 핏자국이 엘리자베스의 흰 드레스 위로 퍼져나가는 핏자국으로 전환된다.


여기에서 잠시 하나의 아쉬움을 이야기하자면, 이야기의 끝맻음이 비극의 서사가 아닌 화해의 서사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에 있다. 원작의 비극성을 차라리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면 괴물이 괴물을 낳은 대를 물린 일종의 저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겠으나, 화해의 서사로 매듭짓는 것으로 인해 맥락에 비해 다소 급작스러운 결말로 나아갔다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델 토로 감독이 그 비극의 서사에 마침표를 짓고자 한 욕심에서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색채의 사용에서 드러난 강한 미학적 감각과 상징을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능력에 비해 서사의 웅장함은 다소 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아쉬움을 뒤로 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서사로 바라보았을 때, 그들에게 새겨진 것은 오로지 증오와 복수, 그리고 욕망만은 아니다. 이제 대중에게 있어서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이다. 그 아비가 남긴 이름으로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빅터의 양 옆에 자리잡았던 대리석 기둥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간 붉은 기운과 같이, 그 피부 아래 흐르는 피와 같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기억되는 그 이름을 그는 선사받았다. 그가 빅터로부터 물려받은, 물보다도 진한 관성으로 이루어진 피는 저주였을지 모르나, 적어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새겨진 긍정적 징표다. 피와 폭력으로 이어지던 그 가계의 사슬 속에서, 이름은 피조물에게 남겨진 존재론적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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