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사랑 - 에필로그

내가 끝내 도망쳤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by 앤희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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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 말수가 적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주연이 되기보다는 조연이 편했고, 조연이 되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렇게 세상을 지나가는 것이 아이의 방식이었다.
그래서일까, 친구들에게는 늘 다정하고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조금도 따뜻하지 못했다.


그런 아이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있었다. 바로 그림자였다.
밤이 찾아오면 그림자는 늘 약속이나 한 듯 나타났다. 어둠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묘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그림자는 소녀의 하루가 늘 궁금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즐거운 일은 없었어?”

그림자의 들뜬 물음에 소녀는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재밌지도, 나쁘지도 않았어. 그냥 그랬어. 그런데 왜 자꾸 귀찮게 묻는 거야!”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하루를 버텼지만, 감정을 감춘 채 지내다 보니 뭐든지 다 귀찮고 힘들었다.
그리고 밤마다 찾아와 집요하게 묻는 그림자가 더 이상 반갑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문득 궁금해졌다.

“그림자, 넌 왜 네 얘기는 하지 않아? 네 마음은 왜 숨기고만 있는 거야? 나한테만 털어놓으라면서… 나는 그런 게 싫어.”

소녀는 거칠게 내뱉었지만, 그림자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널 너무 많이 좋아해… 너도 나를 조금만 좋아해 주면 안 될까?”

순간, 소녀의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나조차 사랑하지 못하는데, 너를 좋아해 달라고?나도 외로워! 나도 사랑받고 싶다고!!네가 내 마음을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귀찮게 해!”


그 말에 그림자의 가슴은 미어졌다. 그러나 애써 애정 어린 목소리로 다가섰다.

“그럼 제발, 나를 좀 안아줘. 내가 네 곁에 있잖아.”

그러나 소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너까지 안아줄 여유가 없어! 나도 힘들어…! 제발 이제 그만 가줘!!”

그 순간, 그림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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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림자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언제나 귀찮다고 내쫓던 존재가, 그 밤을 끝으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홀로 남은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깨달았다.
밤마다 말을 걸어주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오히려 허전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림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소녀가가 끝내 도망쳤던 것은, 결국 소녀 자신이었다.


사랑받고 싶다고 외치던 목소리도, 나를 좀 안아달라던 간절한 부탁도 결국 자기 내면의 또 다른 나였음을.

소녀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이제 내가 널 안아줄게. 내가 나를 사랑해 줄게.”

그제야 그림자가 다시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늘 네 곁에 있었어. 사라진 적은 없었어. 이제야 네가 날 바라봐 준 거야.”

소녀는 조심스레 웃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림자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는 늘 사랑을 밖에서만 찾으려 했지만, 사실 가장 먼저 안아주어야 했던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둠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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