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에도 막부까지 쌓아올린 자치, 그런데 군국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일본의 시민운동과 지방자치의 발전
일본의 전통적인 집단주의와 조화의 가치인 ‘와(和)’는 고대부터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 속에서 발전해 온 조화와 협력의 가치입니다. '와'는 아스카 시대(6세기 후반~8세기 초)부터 대두된 개념으로,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604년에 제정한 '17조 헌법'에서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가치로 강조되었습니다. 헌법 제1조에서 등장하는 '와'는 "화합을 귀히 여기라"고 말하며, 갈등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사회의 기본 질서 유지에 필수적임을 설파했습니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환경 속에서 일본은 내부의 단결과 갈등 최소화가 중요했고 이로 인해 사회 전반에 개인보다는 집단의 조화를 우선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 '와'의 정신은 시간이 흘러 지역 사회와 국가 체제가 갖춰지기 시작하면서도 일본인의 정서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一に曰く、和を以て貴しとなし、忤ふこと無きを宗とせよ。人皆党あり。又達さなき者なし。是を以て、或いは君父に順はず、或いは隣里に違ふ。然れども、上和せざれば下治まらず。人おのおの和を貴んで、共に論うことなかれ。"
(번역) 제1조: 화합을 귀히 여기고 다툼이 없도록 하라. 사람은 각기 당파가 있고, 또 지혜가 부족한 자도 없다. 이로 인해, 혹은 군주나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혹은 이웃과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 화합이 없으면 아래도 다스려지지 않는다. 사람마다 화합을 귀히 여기고 함께 논쟁하지 말라.
그러나 이때의 ‘와’는 중앙 권력에 대한 충성이라기보다는, 주로 "이웃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에 가까운 의미였습니다. 즉, 중앙보다는 지역 사회와의 조화를 중시하는 가치였죠.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에서 일본은 전국시대(15세기 중반~17세기 초)와 이후 에도 막부 시기에도 각 지역 영주들이 자율적으로 지방을 통치하는 형태로 국가가 운영되었습니다. 국가의 통합과 중앙 권력이 완전히 안정되지 못했던 이 시기에 각 지역은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며 독립적인 결속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자치적 정서를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와의 가치는 일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바탕”
“가족과 마을,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욕구보다 앞선다”
- 일본 학자 니시카와 시게루
일본 역사학자 마크 라빈은 이러한 경험을 두고 “지방은 중앙과 떨어진 자율적 결속체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하며 이러한 자치적 경험이 훗날 일본이 민주적 지방자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고대의 ‘와’ 문화와 전국시대의 자치 경험이 맞물리며 일본 사회는 중앙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사회의 토대를 다지게 된 것이죠.
19세기 중반, 일본은 서구 열강의 강력한 압력과 내부적으로는 에도 막부의 점진적 약화 속에서 국가의 생존을 걸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구호가 온 나라에 울려 퍼졌는데 이는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뜻으로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알리며 천황의 권위와 일본의 근대화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이념적 기틀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천여 년간 일본 문화의 중심이었던 천황제를 새로운 국가 통합의 구심점으로 세우는 한편, 중앙집권과 산업화를 가속화했습니다. 이는 일본 전역을 측정하고 통합하려는 표준화 작업으로 이어졌으며, 각 지역이 전통적으로 유지하던 자치권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천황은 단순한 정치적 지도자를 넘어 신적 존재로 여겨졌고, 곧 국민들에게 강력한 충성과 복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학교에서는 '교육칙어'에 기반한 교과서를 사용했는데요, 이 탓에 학생들은 개인의 꿈이나 욕구보다는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당대를 살던 한 고등학생의 일기에는 “내 개인의 꿈은 나라가 허락할 때까지 감춰야 한다”고 적혀 있었죠. 이러한 문헌에서 보이듯, 군국주의적 사고와 집단주의 의식이 당시 일본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군국주의와 국가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충성심은 전후 일본이 민주적 자치의 시대를 맞이할 때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학자 요시노 마사히로는 "전쟁의 경험이 중앙 권력과 시민 간의 조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사고를 형성했다"고 지적하면서, 전후 일본의 시민사회가 정부와의 협력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요시노 마사히로. (2003). 일본 사회의 중앙집권과 지방자치의 역사적 고찰. 도쿄: 일본사회학회.
요시노 마사히로. Democracy and Self-Government in Japan. University of Tokyo Press, 2007.
니시카와 시게루. (2010). 와(和)의 문화와 일본 사회: 집단주의와 국가적 정체성 형성에 대한 연구. 교토: 국제일본문화연구소.
Ravina, M. (1999).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