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식의 사람

사랑하고 싶은 사람

by 동인천특급


매일 쓰는 바디워시 향이 코끝에 닿는다. 늘 맡던 익숙한 향이었지만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더 향긋하게 느껴진다. 샤워를 마치고 바르는 바디 로션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질감이었지만 피부에 닿는 순간 상큼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욕실 타일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욕실 안을 울린다. 물기를 닦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채 욕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감싼다. 발가락이 차가운 마루 바닥에 닿을 때마다 작은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오늘따라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듯하다.



흐릿한 아침 안개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화장대 앞에 섰다. 거울 속 얼굴은 늘 마주하던 익숙한 풍경. 하지만 희미하게 번지는 낯선 기운은 지울 수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어제와 같고 늘 보던 모습과 다름없었지만, 미묘하게 다른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술이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더 생기 있어 보였다. 피부톤도 평소보다 밝아진 것 같고, 눈빛도 조금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설렘 같은 것이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듯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내 방 바닥에 사선으로 그림자를 그린다. 그림자 끝에 놓인 책 한 권. 어제의 빗 속에서 그와 이야기했던 소설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을 집어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아침 공기가 상쾌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내린 비로 세상이 깨끗하게 씻겨 나간 듯했다.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은 더욱 푸르게 빛났고,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책을 펼치자 그가 말했던 페이지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그는 이 책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우리는 같은 페이지에서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이 문장이요, 여기...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의 침묵을 이해한다는 뜻이다'라는 부분이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그때 그의 손가락이 책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떨림이 단순한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내 존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것은 분명했다.



"희나씨는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세요?" 그의 질문이 귓가에 맴돌았다.



"저는... 진정한 이해란 말로 표현되지 않는 부분까지 읽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말하지 않은 생각, 표현하지 않은 감정까지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이해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내가 대답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확히 제가 생각한 것과 같아요. 대화의 내용보다 그 사이의 간격, 말하지 않은 것들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상식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때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에서 순수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희나씨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셨어요?" 그때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에서 순수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그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기쁨으로 다가왔다.



나는 사랑을 '상식을 공유하는 관계'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오래된 믿음과 같은 갈망이었다. 심장을 멎게 하는 강렬한 운명이나 숨 막힐 듯한 낭만적인 드라마는 아니었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 진심이 닿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 침묵 속에서도 어색함 없이 서로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과의 만남을 간절히 꿈꿔왔다. 어쩌면 조금은 좁고 답답할 수도 있는 나의 상식의 세계를 넓은 마음으로, 아니 설사 좁은 마음을 가졌더라도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도록 태어난 사람.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와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영화를 보며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대화는 표면적인 것에 그쳤고,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결국 1년 만에 우리는 헤어졌다. 그 후로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모두 비슷한 패턴으로 끝났다. 상식이 통하는 관계, 그것은 단순히 취향이 비슷한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다. 상식은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경험과 가치관, 취향과 신념, 그리고 감수성까지 그 모든 것들이 녹아 만들어진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세계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삶의 경험들, 책과 영화, 음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세상, 수많은 인간 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깨달은 것들. 그 모든 조각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개인의 고유한 상식의 틀. 나 역시 나만의 상식을 세상의 기준으로 삼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해왔다. 그러니 내게 있어 사랑의 대상이라 함은 나와 상식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나의 좁은 상식의 세계를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 빌어 한 뼘이라도 넓혀 낼 서 있지 않을까하는 남모를 기대를 품어왔으니 말이다.



서재 책장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 책들은 내 세계를 형성하는 작은 조각들이었다. 김연수의 소설부터 시작해 칼 세이건의 과학서적, 그리고 최근에 빠져있는 영화 평론 책들까지. 그 책들은 내 상식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책장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책등을 하나씩 쓸어내렸다. 이 책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켠에는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만의 프리즘은 너무나도 나만의 것이어서 과연 이 넓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과연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을까. 나의 상식은 영원히 타인과 닿을 수 없는 외딴 섬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부엌으로 가서 차를 한 잔 우렸다. 뜨거운 차의 김이 따가운 아침햇살을 누그러뜨린다 . 문득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그 사람을 떠올린다. 그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순간들. 그리고 빗속에서 함께 걸었던 시간도.



어제 저녁에는 새로 가입한 글쓰기 모임을 나갔다. 사실 이 모임에 가입한 것도 우연이었다. 한 달 전, 동네 서점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알게 된 모임이었다. 모임이 열리는 카페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낡은 건물 2층에 위치한 이 카페는 오래된 책들과 빈티지한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카페 한쪽 벽면에는 책장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글쓰기 모임이 열렸다. 어제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각자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었다. 나는 짧은 에세이를 한 편 준비해갔다. 모임이 끝난 후, 몇몇 사람들은 카페에 남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9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카페는 10시에 문을 닫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도 마지막 남은 차를 마시고 일어났다. 카페 문을 나서자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페 차양막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 겨를에 본 유리창 너머 카페 안 풍경은 흐릿한 수채화 같았다. 노란 조명 아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과 책들, 그리고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 요소 하나 뺄 것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게 완성된 그림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한 미소와 함께 어색함 없이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문득 모임 내내 내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경청하던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 희고 말간 피부와 크고 동그란 눈은 왠지 모르게 순한 인상을 주었지만 날카로운 듯 섬세한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차분한 목소리, 논리적인 말투, 모노톤의 수수한 옷차림은 그의 수수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몇 번 눈이 마주쳤을 뿐임에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낯설지 않았다. 묘한 편안함이 마음 한켠에 조용히 깃들었다.



"어, 안녕하세요. 비가 갑자기 쏟아지네요." 나도 모르게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빗물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고, 미소는 진실되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혹시 우산 있으세요?" 그가 물었다.


가방을 뒤적거렸지만, 우산은 없었다. 아침에 날씨가 좋았기에 우산을 챙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아, 깜빡하고 안 챙겨 왔어요."


"저, 마침 우산이 하나 더 있는데… 하나 빌려드릴까요?" 그는 가방에서 작은 접이식 우산을 꺼내 내게 건넸다.


"아, 정말요? 그럼 너무 감사하죠."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안한 미소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공기가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우산을 받아들자 그의 손가락이 잠시 내 손에 닿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가 내 손을 통해 전해지는 듯했다.


"저, 혹시 집 방향이 어디세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 근처예요. 걸어서 15분 정도?" 나는 손으로 대충 방향을 가리켰다.


"저도 이쪽인데… 그럼, 집까지 같이 걸어갈까요?" 그의 물음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수순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렇게 해요."


우리는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빗길의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그의 존재가 주는 온기가 있었다. 거리는 비로 인해 한산했고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반사되어 빛났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과 도로변 상점들의 네온사인이 빗속에서 번졌다.


"글쓰기 모임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그가 물었다.


"한 달 전에 동네 서점에서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됐어요. 글쓰기에 관심이 있어서 참여하게 됐죠. 그쪽은요?"



"저는 친구 소개로 알게 됐어요. 출판사에서 일하다 보니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서요. 이런 모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들으면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아요."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말없이 걷기도 했지만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빗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희나씨 글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참 독특해요. 특히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포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그의 말에 나는 살짝 부끄러워졌다. 내 글에 대한 진심 어린 평가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적인 칭찬만 했기 때문이다.



"감사해요. 사실 글쓰기가 아직 서툴러서 많이 부족해요."



"아니에요. 오히려 그 서투름이 글에 진정성을 더해줘요. 완벽하게 다듬어진 글보다 때로는 날것의 감정이 담긴 글이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거든요." 그는 내 글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해주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책과 영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하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며, 재즈 음악을 즐겨 듣는다.



"저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요. 특히 '시'는 여러 번 봤어요." 내가 대답했다.



"정말요? 저도 그 영화 정말 좋아해요! 특히 미자가 강가에서 시를 쓰려고 노력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어요. 평범한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그 과정이..." 그의 눈이 반짝였다.



"맞아요! 저도 그 장면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순간, 일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특별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잖아요. 그게 저에게는 상식이 확장되는 순간처럼 느껴졌어요."



"정확히 그거예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리고 그 발견을 누군가와 공유할 때의 기쁨이란..."



우리는 같은 영화를 좋아했고 같은 영화에서 같은 의미를 발견했다. 취향이 비슷한 것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닮아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희나씨랑은 처음 만났는데도 왠지 모르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했어요. 음… 뭐랄까,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보는 기분이에요." 그가 수줍은 듯 웃으며 덧붙였다.



"비유가 좀 이상한가요?"


이상한 비유가 아니었다. 나도 그에게서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보듯 익숙하고 편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공감대가 만들어진 은유였기 때문일까. 그의 말은 단순히 칭찬이나 호의적인 표현을 넘어 더욱 깊은 차원의 공감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아, 어쩌면 나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상식이 통하는 사람을 바로 눈 앞에서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빗줄기는 점점 약해졌지만 우리의 대화는 더욱 깊어졌다. 그는 언젠가 자신만의 책을 출판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의 꿈은 달랐지만 그 꿈을 향한 열정은 같았다.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팔꿈치가 살짝 스치는 듯 마는 듯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빗방울이 보송한 손등 위에 맺히는 감각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손등에


도 빗방울이 맺혀있을까? 그의 손등에 맺힌 빗방울을 닦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첫 번째 횡단보도에서


밤 10시 15분, 우리는 큰 도로변의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다. 횡단보도 옆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곳 아래 우리는 마주 섰다. 사실 우리집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 어쩌면 잠시나마 그 불빛 아래서 저 건너편 사람들의 시선에 우리가 함께 담기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마치 같은 액자 속 두 피사체로 동등하게 빛나는 존재로 말이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긴 속눈썹,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빛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윤곽선이 유난히 또렷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에도 저랑 같이 영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부드러운 불빛에 물든 하얀 얼굴 위로 그의 동그란 눈이 나를 깊이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다음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 담겨 있는 듯했다. 심장이 순간 울렁거렸다. 예상치 못했던 제안.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망설임은 없었다. 되레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졌다. 그와의 대화가 얼마나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기에 그저 편안하고 익숙한 기분이었다.



"네, 좋아요. 저도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진심이었다. 그와 다시 만나고 싶었다.



"정말요? 다행이다. 저 사실 약간 걱정했거든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인가 싶어서." 그가 안도하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꾸밈없이 맑고 순수하다.



"아니에요. 저도 기대돼요. 다음에는 어떤 영화 이야기를 할까요?"



"음… 글쎄요. 다음에는 희나씨가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혹시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나 감독 있으세요?" 그의


질문은 섬세하고 배려 넘쳤다. 상대방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호기심이 묻어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와 함께 걷는 길 따뜻하고 포근한 안도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는 나의 상식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의 생각과 감정을 너무나 잘 알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 나는 나의 상식대로 움직여도 괜찮았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자유와 해방감이다. 찰나의 짜릿한 해방감을 맛본 후 그의 옆모습을 살며시 바라보았다. 오뚝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이 가로등 불빛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에 잠시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남몰래 침을 삼키다 사레가 들 뻔했다.



두 번째 횡단보도를 만났다. 도보로 15분 거리라던 우리집은 그와 함께 걸어 40분이 소요됐다.


"여기 횡단보도 앞에서 저는 이쪽으로 가야 해요." 그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타고 전해진다. 나는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행복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네. 그럼 저도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오늘 우산 빌려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아니에요. 별 말씀을요. 저도 희나씨 만나서 정말 즐거웠어요. 오랜만에 이렇게 편안하게 대화하는건 오랜만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도 진심이 묻어났다. 나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맑고 따뜻한 눈빛.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묘한 안도감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나에게 만큼은 참 좋은 사람이야.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희나씨 대해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그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발걸음을 멈춰 망설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작별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면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할까. 주변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는 듯했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 그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그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귀 안에 울렸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나는 급하게 대화를 매듭지으며 방금의 발언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숨이 내 뺨에 닿았고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말을 걸었다.



"저 희나씨를 좀 더 알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잠시의 경직은 어디까지나 잠시였다. 나는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반감이나 당혹감이 밀려오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하고 따뜻한 햇살이 내 마음을 감싸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진심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 그는 내게 '너'였다. 설명이나 이해의 대상이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존재. 그 눈빛 속에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좀 더 알아가고 싶어요." 그가 속삭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머리 속에 작은 물음표 하나 느낌표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왜 이 사람이 끌리는지 이유나 의문조차 생기지 않고 수용하는 경험. 새로운 사랑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가 돌아서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나는 사랑에 빠지겠구나. 그것도 아주 깊고 진한 사랑에.



같은 영화를 좋아하고, 같은 책에 밑줄을 긋고, 같은 음악에 감동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는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불안감도 밀려왔다. 내 상식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과 동시에 이것이 일시적인 착각은 아닐지 더 알아갈수록 실망하게 되진 않을지 두려웠다. 지금까지의 관계들이 그랬으니까. 처음엔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발견하게 되는 그 익숙한 패턴.



핸드폰이 울린다. 그의 메시지다. "다음주 화요일에 시간 있어요?" 심장이 빠르게 뛴다. 두 번째 만남. 우연으로 시작된 만남이 선택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는 간단히 답장을 적었다. 간결하지만 진심을 담은 답장. 새로운 시작에 끌리는 내 모습을 다시 발견하지만 더 이상 미래를 예측하거나 결과에 대해 섣불리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침대 옆 서랍에서 오래된 일기장을 꺼냈다.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이었다. 첫 페이지를 펼쳐보니, 그 때 적었던 내 생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사랑할 사람은 아마도 나의 상식으로 세상을 살게끔 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 문장을 일기장에 적은 것도 꽤 오래전이다. 내 상식을 공유하는 사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아마도 당신일 것만도 같단 생각을 한다.



유난히 향긋한 바디워시 향이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던 불안감을 옅게 녹이고 그 자리에 희미한 설렘을 피워올렸다. 나는 그 설렘을 따라갈 것인가. 일단 지금 이 감각과 이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며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을 유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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