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일승 Dec 11. 2021

12  12를 말한다

1979년 초겨울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운동을 하고 학교 앞 중국집서 저녁을 먹었다.

항상 그랬듯이 짬뽕에 싸온 도시락 밥을 말아서 배불리 먹고 좀 쉬었다. 다시 학교에 올라가서

야간에 개인 운동을 한다.

주인아저씨는 항상 우리에게 방을 따로 주셔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쪽 잠을 자기도 한다.

독립된 방은 도시락에 밥을 말아먹을 때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당시 도시락은 양철로 만든 두께가 두 배정도 되는 어마어마하게 양이 많은 도시락이었다.

물론 수업시간에 난로에 올려놓고 먹어도 끄떡없는 그런 재질이었다.

하지만 그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학교는 바로 소화가 되었다.


우린 체육관이 없었다.

학교 교실 건물 뒤켠에 시멘트로 만든 코트가 유일한 농구장이었다.

학생들이 수업 중 쉬는 시간에도 농구부가 운동을 할 때도 이곳을 쓴다.

여기서 운동을 하면 저 위쪽 동구여상 학생들이 우리 쪽을 쳐다보고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 해 10 26 일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다.

당시 박 대통령의 존재는 그랬다.

TV에서 서거 소식이 나고 뉴스에 그런 영상이 나올 때마다 거리에서 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많이 나왔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통곡도 하는 걸 봤다.

이제 북한 곧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평소에는 동국대학교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면 두셋이 짝지어 동국대학교로 향했다.

홍대부고 선배 중 한 분이 동국대학교 감독을 맡고 계시면서 우리도 같이 지도를 하셨다.

하지만 10 26이 나고 대학교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운동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좀 넘었다. 2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한 참 운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체육관을 쓸 수가 없어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을 했다

잠시만 참으면 대학교도 들어갈 수 있고 체육관도 쓸 수 있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늦게 시작한 운동이 따라가기가 버거워 학교에 2년을 유급하겠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너무 좋아하신다. 그 당시 유급은 운동부에선 흔한 일상이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 결국 1년만 유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 앨범이 없다. 동문회를 나가도 입학기 수로 나간다.  ㅎ ㅎ


시멘트 바닥 이게 우리의 연습장이었다.



우리 학교는 재작년부터 중학교에서 선수 수급이 안돼 학교 재학생들 중  키가 큰 학생들에 농구를 권유했다.

체육 선생님은 농구부 감독 이셨다. 그래서 체육 수업 때마다 농구부 가입을 권유하셨다. 시간이 지나 중학교가 창단되고 근처 초등학교가 농구부가 생겨 우수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지금 삼성 감독 이상민 LG 감독 조성원 등도 이래서 홍대부고를 졸업했다.


대충 우리 동급생 중 5명 정도가 그 리스트에 있었다.

그리고 둘은 일 학년 때 운동을 바로 시작했고 나는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고 담임선생님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처음 고등학교에 진학해 농구부 응원을 갔는데 이때부터 머릿속엔 온통 농구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서 키 크고 운동 좀 한다고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맨 처음 야구를 하고 그 담은 축구를 했다.

중학교를 진학하자 운동부가 없어 그냥 체력장이 전부였다.

그리고 방과 후 애들끼리 책가방 쌓아놓은 골대에서 축구를 하는 게 내 몸에 있는 운동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 와서 농구를 처음 접했다.

체육관에서의  함성은 나에겐 신내림과 같았다.

농구는 자전거와 같다 어릴 때 안 배우면

어른이  되거나 나이 먹으면 절대 안 되는 운동이었다.

그러면서 교내 체육대회서 우리 반이 농구 우승을 했다.

전국대회 우승처럼 뿌듯했다. 금방 선수가 된 것처럼 우쭐했다.

한 일 간을 그런 마음속 혼란 속에 운동을 시작했는데 체육관도 없이 맨바닥 시멘트에서 운동을 한다.


이 나무 위에 선생님은 백열등 하나를 달아 주셨다. 이렇게 시작한 우리들은 딱 일 년 만에 전국대회서 준우승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마지막 전국대회가 되었다.



새로 오신 코치 선생님은  정해영 선생님이셨다.

물론 체육선생님이자 코치 선생님이셨다.

청주에서 오신 정선생님은 집도  아예 학교 옆으로 이사를 하셔서 열정적으로 우리를 지도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이 저녁에 늦게까지 학교 시멘트 코트서 운동을 하는 걸 아시고 골 대옆. 큰 느티나무에

전등을 달아 주셨다. 너무 힘들어 날이 흐리면 시멘트 바닥에 물을 부어 비가 왔다고 해서 운동을 쉬고 싶었지만 그러면 우리는 바로 성북동 북악 스카이 웨이로 해서 삼청 터널 삼청공원까지 로드웍을 가야 했다.

일반인들이나 차들이 갈 수 없는 길이지만 군인들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우리에겐 허락을 해줬다.


1979년 12월 12일 그날도 우리는 저녁을 먹고 학교를 올라갔다.

겨울이라 손등이 시린 야외 코트는 뜨개질로 손장갑을 만들어 끼어야 했다.

그 당시는 대부분 슛 연습을 했다

우리끼리 연습을 마치고 나는 성북동에서 85번 버스를 타고 방배동 집에 가야 했다.

성북동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시내불빛이 언제나

반짝이며 우리를 반긴다

언젠간 저 불빛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선수가 되리라

우리들 마음속엔 언제나 그런 다짐으로 발길을 집으로 향했다

버스는

대부분 막차를 타고 갔는데 한강대교를 건너야 했던 버스가 어디서부터 움직이질 않았다

물론 자고 일어나 보니 한강을 건너지 못한 거리 모습이 보였다. 이 버스는 흑석동 중앙대까지 가는 버스였다.

또 갈아타야만 했지만 꽤 오랜 시간 우리는 버스에서 있어야 했다.


신군부들이 12 12에 성공한 후 찍은 사진이라 한다.



우리는 체육관을 가지 못해 이렇게 야외에서 운동을 해야 했다.




그때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냥 못 가거니 하고 내리래서 내렸다.

집에 가는 것도 막막하고 더 이상 방법을 찾지도 않았다

이 때다 싶어 친구 집에 가서 자는 생각에 들떠 집에 안 가는 게 더 좋았다.  아침에 오는 등교길은 너무 멀었다 ᆢ

뭔 일이 일어났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아마 서울역까지 걸어 장위동 친구 집 가는 버스를 타고 친구 집에서 밤을 보냈다. 시간이 흐른 뒤,  이 날 밤 벌어진 일들이 우리 시대의 흑역사가 된 큰 사건이라는 걸 알았다.

이날만 되면 나는 친구 집에서 모처럼 자는 외박의  그날을 떠 올린다.


그리고 다시 체육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근 일 년이 흘렀다.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엔 그렇게 10.26,  12. 12,   5 18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가 있었다.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스포츠대회들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처음 나간 전국 대회서 우리는 준우승을 했다.

KBS에서 중계를 하며 친구들한테 전화가 많이 왔다. " 왜 1학년 이냐?"


12월 12일이 되면 철 모르던 시절 친구 집서 자던 그날이 떠 오른다.




작가의 이전글 이 글은 간접 광고가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