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부러움 그 사이의 간극
첫 번째 여담에서 불행에 대해 글을 쓰고 나서 말의 순서가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만 놓고 보면 만사행복하고 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굉장히 구질구질하고 습습한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종종 저 자신을 다 먹은 빵 봉지 맨 아래 깔려있는 부스러기와 동일시 여기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두 번째 여담이 보기 싫게 구겨진 저의 속마음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미운 생각을 달고 살던 어른일 때가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주변에서 누가 승진을 했네, 연봉을 올렸네, 결혼을 했네, 이사를 갔네 하는 소식을 들으면 겉으로는 축하해 주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무엇이 부족해서 그들보다 나아질 수 없는지, 왜 거울 속 나는 점점 못난 어른이 되어가는 건지에 대한 고민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갔습니다.
그 친구들이 학벌이 좋아서 나보다 잘 사는 걸까? 생각해 보면 지인의 대다수는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들이었고, 운이 좋아서? 맞죠. 운도 실력이라 하는 세상에서 능력에 운까지 겸비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능력일 수 있겠습니다. 그럼 집안이 좋아서?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애초에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기에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그냥 이건 신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며 신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렇게 마인드맵처럼 이 고민과 부러움의 원인을 찾기 위해 생각해 낸 결론은 제가 게으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들은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으며 노력하는 동안 어떻게 하면 침대에 더 누워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방안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을리가요. 그러니 남들보다 뒤처져갔던 게 당연했습니다.
"아무도 꿈이 없는 자에겐 기회를 주지 않아. 하긴 무슨 기회가 어울릴지도 모를 거야."
악동뮤지션의 '후라이의 꿈'에 나오는 가사처럼 저를 불쌍히 여긴 누군가가 기회를 주었어도 그게 기회인지도 몰랐겠죠. 노력을 안 했으니까요.
결론을 내었고 부러움의 원인을 알았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습니다. 그저 그 부러움에 게으름에 대한 죄책감이 추가되었을 뿐, 미운 생각만 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예쁘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으로 변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게으른 나를 탓하며 남을 부러워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빠가 아프고 난 뒤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하는 재정과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저의 불안과 마음속 깊은 곳의 질투심 그리고 남을 통해 느끼는 부러움을 더 진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채화처럼 잔잔하게 퍼져있던 생각들이 진하게 덧입혀져 굳어져갔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연구했지만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새로운 걸 시도하기에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또 언제 배워서 언제 시작해서 언제 경력을 쌓나 하는 게으른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라 유혹하던 뱀의 속삭임이 이만큼이나 달콤했을까요.
그러는 사이 사람을 만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과 무슨 말을 하며 지냈는지도 모르겠었습니다. 그들과 만남에서 제가 하는 거라고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하다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았습니다. 와중에 누군가 나에게 실망한다는 것은 또 지독하게 싫어서 만남이 뜸해진 이유를 바쁨으로 포장하며 겉으로는 쿨하고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하루는 정말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근황에 대해 주고받는데 지인의 아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소식을 듣던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이런 식으로 추임새를 넣고 있었습니다.
"와 그 사람 돈 많나 보다."
"아 진짜? 완전 운빨 아니야?"
"역시 학벌이 최고야. 그분도 학벌이 좋으시지? 학벌주의 세상에서 나 같은 사람은 살겠어?"
가만히 듣던 지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야니야. 거기에서 일한다고 다 돈 많은 것도 아니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야. 운이 좋아서 합격한 것도 아니고.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말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내면의 못남을 숨긴다는 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나 마찬가지더군요. 지인의 따끔한 한 마디를 들은 이후 숨겨왔던 밑바닥까지 들통나게 될까 무서워 네 아니요만 할 수 있는 기계처럼 질문에 대답만 하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점 숨어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알람이 울리지 않는 카카오톡 메세지함을 볼 때마다 씁쓸하면서도 홀가분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마음을 포장할 일도 없으니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던 건 거리에 지나다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하면 그것마저 부러워하는 저를 발견했을 때였습니다. 행복하다는 듯 웃는 그 웃음소리를 빼앗고 싶었습니다. 즐겁다는 듯 웃는 밝은 미소가 저의 것이었으면 했고, 당당하고 힘 있는 걸음걸이에 시선이 갔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걸 알면 얼마나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까요. 그때쯤이면 서서히 미쳐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지라 딱히 틀린 말도 아닌 듯합니다.
산책을 하면 산책을 하는 대로, 창밖을 보면 창밖을 보는 대로 눈앞에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살길래 저렇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까? 나는 왜? 아 그렇네 나라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으로 재생되었습니다.
행복을 잡으려 노력하지도 않는 게으른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끔찍해하며. 하는 건 없는데 자신을 채찍질만 하는 아주 이중적인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달.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해성사란 말 그대로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작은 성당 한켠에 있는 고해소.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고요한 그 공간에 저의 숨소리가 조용히 울렸습니다. "들어오세요"라는 신부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없었다면 그냥 나갔을지도 모르겠어요. 고해소 중앙. 무릎을 꿇고 앉아 고해성사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요즘 고백할 죄가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게을러서 남을 부러워하며 시간을 쓰고 있는 것밖에 더 있었을까요.
"저의 게으름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성공과 기쁨을 부러워했습니다."
단 하나, 딱 저 문장 단 하나였습니다. 다른 잘못은 생각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간단명료한 고백을 가만히 들으시던 신부님이 나지막이 이야기하시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게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보세요."
고해소에 방음은 잘 되어있을까요? 고해성사가 신부님과 저 단 둘이서만 하는 것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모릅니다. 그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이 제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또한 너의 일부이니 함께 살아가보라는 응원을 말을요.
지금도 저는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최근에도 지인을 만났는데 해외로 나가려 한다고 하더군요. 저의 오랜 꿈을 누군가가 먼저 실현하려고 한다는 것에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누군가가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예전에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묻어내면 저를 질려하거나, 혹은 실망하거나, 그 사람들이 상상했던 나라는 사람과는 너무 다를까 봐 말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그들은 아무렇지 않더군요. 머뭇대며 던져본 말을 가볍게 받아주며 저의 걱정거리를 그저 별거 아닌 것처럼 넘겨주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건대 지인들 또한 저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니 저도 꽤 운이 좋은 사람 같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많이 부러워하고 그만큼 축하도 솔직하게 해주려고 합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생각을 고쳐먹기로 결심한 제 자신을 보는 게 썩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숨어있던 게으름을 발견하면서 살아갑니다. 어쩜 양파처럼 까도 까도 게으른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는지, 저라는 사람에게 비꼼의 박수를 보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저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잘 타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지금도 망가졌던 일상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데 작지만 무엇이라도 이루어내는 저를 칭찬하며 살아가다 보면 저에게 어울리는 기회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뒤돌아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제 자신을 게으르다고 탓하기만 했지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에 대한 칭찬을 해준 적은 없더군요.
양귀자 작가님의 소설 '모순'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꽤 오랜 시간을 위의 글귀처럼 생각하고 살아갔기에 자기혐오로 문드러져갔나 봅니다.
부러움에 잠식되어 타인의 힘듦이나 슬픔을 보려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힘듬은 세상의 이치와 같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모순된 감정인지를 압니다.
저는 아직도 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고 삶이 힘든 게 이해가 안 갑니다. 한번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기만 해도 부족한데 왜 세상은 행복하게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까요. 인간은 고난을 통해 성장해 간다지만 저는 고난을 원한적도 없는데요. 하지만 이런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잘 살아내 보는 것도 앞으로 끊임없이 연마해야 할 숙제 같습니다.
생각을 고쳐먹겠다 마음먹은 뒤로 입버릇처럼 되뇌이게 된 문장이 있습니다. 지난번 여담에서도 말했던가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너무 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관대해서도 안되겠지만요.
삶을 살아가고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건 그 균형을 맞추어간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